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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e 육은주 Oct 20. 2023

최초의 가치 설계자

현대에 들어 칼 든 선비의 대표적 인물 (persona, personification)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그때그때 시대적 소명에 맞는 개혁을 해왔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이래의 나쁜 구가치는 아직도 말끔히 청산되지 않았다. 지금껏 해왔던 것이 경영학에서 말하는 점진적인 개선(incremental innovation), 개혁이었다면, 지금부터 필요한 것은 슘페터가 말하는 파괴적인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다. 

이 가치의 파괴적인 혁신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정희 얘기를 꺼낼라치면 경기를 일으키는 젊은 독자들이 많음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 필자의 딸들이 바로 그렇고, 필자 또한 젊은 시절에는 박정희를 찬양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박정희의 업적과 그 업적의 중요성은 그가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점도 있지만,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그가 바로 가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혁신을 벌인 최초의 지도자라는 점이다. 그의 집권 초기는 6.25가 끝난 지 불과 몇 년도 안된, 북한의 위협이 그저 공포탄으로 느껴지지 않는 살벌한 시기였다. 자고 일어나면 공비가 나타났다, 무장간첩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렸고, 청와대 뒷산으로 공비가 넘어들고, 판문점에서는 북한군에 의해 도끼로 미군이 살해되는 일이 일어났다. 경제 수치상으로 북한에도 뒤졌다. 그는 북한에 군사적 우위는 물론 경제도 발전시켜야 했고, 무엇보다 이념전쟁, 가치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가 설파한 가치는 바로 잘 알고 있는 대로 (우리도 남들처럼 한번) ‘잘 살아보세’, ‘하면 된다,- 영어로는 할수 있다 (can do spirit)로 번역’였다. 그것을 위해 그가 가정 먼저 벌인 것은 의식개혁이었다. 

그는 조선 봉건 체제의 극심한 억압으로 인한 집단 무기력, 일제강점기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의 뇌리에 박힌 패배의식을 죽이고자 했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지도자였다. 박정희는 가깝게는 일제강점기, 6.25 전후복구 시기, 길게는 몇백 년을 이어온 불평등과 가난이라는 굴레를 끊고자 했다. 그 방법은 비록 매우 강압적이었으나 그것은 지난 시대를 죽이려는 살부의 정신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필자는 박정희가 유일무이 영원무궁한 대통령일 것만 같던 70년대 초중반, 경상북도 북서부의 ‘국민학교’를 다녔다.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주의와 더불어 화랑과 원화, 화랑도 정신을 도덕시간에 지속적으로 교육받았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운동장에는 세종대왕 동상 옆에 화랑과 원화의 동상이 있었다. 화랑도가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교육되며, 신라의 우월성과 정통성이 은연중에 주입되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장엄하기 그지없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고,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통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아침마다 스피커에서 새마을 노래 및 각종 행진곡풍의 클래식이 큰 소리로 흘러나와서 온 동네 주민이 일시에 잠을 깨야 했고, 오후 다섯 시 사이렌이 울리면 또 온 국민이 길 가다가도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한 자세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수행했다. 필자는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면서, 주위 사람 누가 안 하나, 혹시 딴 짓을 하지는 않나 힐끔거리던 ‘모범 어린이’였다. 

당시 새마을 운동의 실천 슬로건은 ‘근면, 자조,협동’이었다. 이것을 뒤집어보자면, 당시 한국인은 '근면하지도, 스스로 돕지도,  서로 돕지도 않았다'는 뜻이 된다. 

필자가 기억하는 당시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지도, 열심히 일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았다. 방학 때마다 충청북도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방학을 보냈는데, 당시까지도 전형적인 대가족 농경문화를 간직하고, 집성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명절과 시제 때면 먼 친척들까지 다 와서 함께 제사를 지내고, 제사 후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돌아가며 노래 자랑이 벌어지고, 함께 춤을 추고 놀았다. 평소 보던 근엄하신 분들이 맞나, 어린 눈에 낯설 정도로 자발적인 흥이 넘쳤다. 

아버지가 다니시는 직장도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동료들과 철마다 경치좋은 데 놀러가고, 천렵가고, 낚시가고, 어린 나의 눈에 보아도 회사를 다니는 것인지, 동호회를 다니는 것인지 모를 그런 분위기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별되는 점은 경제발전 이전에 정신 혁명을 이루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국인을 가장 잘 아는 방법으로, 심리 자극을 하는 방법으로. 경쟁을 시키고, 자극을 시키고, 우리도 남들처럼 잘 살아보자는 경쟁심, 수백 년 동안 억눌려 있던 그 어마어마한 발전 욕구, 상승 욕구를 박정희는 통렬하게 내리쳤다. 국민은 응답했다. 필자의 아버지 세대분들은 바로 박정희와 이 정신개혁의 짜릿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분들이다. '태극기 부대'라고 폄하받는 그 분들에게 있어 박정희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인 듯하다. 

그리고 그는 산업화의 인프라를 깔 때 통상적인 방법이 아닌 퀀텀 점프 방식을 택했다. 개도국들의 전형적 방식인 경공업에서 시작, 차근차근 해나가는 방식이 아닌 처음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 했다. 뼛속까지 군인이었던 그가 북한의 위협에 대항할 방위산업을 키울 목적도 있었다지만, 주변국의 냉소와 회의적인 반응을 뚫고,고, 관철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강력한 지도력과 리더십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퀀텀 점프 방식은 그 후 중국이나 베트남 등의 급속한 경제 발전의 롤 모델이자 참고서가 되었다. 

박정희가 아니어도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이들도 많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지도력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잘 알고 있지만 모종의 목적을 위해서 박정희의 정신혁명과 지도력을 애써 폄하하려 애쓰는 자이다. 일부 학자나 논객들이 말하듯 박정희 전 장면 정부에서 경제개발계획이 이미 짜여 있었다는 것, 미국이 도와주었다는 것, 정주영 이병철 같은 1세대 경영인들이 실제로 이루었다는 것, 국민의 희생이 컸다는 것 등 다 'it could be' 일정 부분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정적을 탄압하고, 반대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공포정치를 했고, 문화를 검열한 것 등 잘못한 점도 많다. 

그러나 박정희의 지도력은 폄하할 수 없다. 오백 년 동안 타의에 의해 잠들어 있던 한국인의 야성을 깨우고,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끌어내고, 기적적으로 성과를 이루어내게 한 것은 그가 가치의 중요성을 아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필자가 지금 박정희의 가치 학명을 높게 평가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높은 산은 그림자도 길듯, 그가 끼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우리 모두 겪었다. 우리가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문화적 영향력을 갖게 된 이후에야, 필자 개인적으로도 한국인의 정신적 가치라는 주제를 오래 고민해오면서 차차 아버지 세대와 화해하고, 그를 극복하듯, 그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실천적 지식인, 칼 든 선비의 걸출한 예로, 대한민국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를 담대한 결단과 실천의 지도자가 맞지만 그가 정립한 경제 발전 중심 철학은 철학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필자는 박 대통령 당시 '국민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 현란하고 장엄한 문장의 국민교육헌장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이었다. 박 대통령은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며 경제에 집중,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했지만, 능률과 실질을 넘어선 삶의 근본 철학, 한국인의 고등 철학에 대한 부족함과 갈증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경제발전의 첫 단추를 잘 꿴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이를 실행해낸 실천적 위대함과는 별개로, 그후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난 후의 공허함, 아노미 상태, 배금주의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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