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기억 한 조각
따로 또 같이 첫 문장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기억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기억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같은 반도 아니었고, 특별한 접점도 없었다. 그는 늘 자기 친구들과 어울렸고,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그러다가 그의 집이 도시로 이사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그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우연히 동네 도서관에서 그랑 마주쳤다. 그곳은 겨울방학 숙제를 하려는 아이들로 북적였고, 나는 여느 때처럼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독서록을 적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패딩에 짧게 자른 머리, 전보다 훌쩍 자라 있었던 그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너 여기 자주 와?”
그는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물었다..
“응. 숙제하려고.”
짧은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 그날 이후 왠지 그를 의식하게 됐다.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면 그는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고,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겨울은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해가 바뀌고 여름이 오자, 그는 또 나타났다. 이번에는 마을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며 청소년 자원봉사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작은 마을회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활동이었고, 나도 친구를 따라 참여했었다.
그는 아이들을 다정하게 챙겼고, 조용히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
활동이 끝난 날, 마을 끝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해가 길어진 여름 저녁, 마을은 아직 환했고,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긴 그림자 속에서 그가 말했다.
“너, 초등학교 때도 조용했지? 근데 웃는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남더라.”
아무렇지 않게 웃었지만, 그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돌아가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갑작스러운 비에 우린 마을 슈퍼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축축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나, 이런 날 좋아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기분이잖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와 나 사이의 공기가 살짝 달라진 듯한 순간에 멀리서 친구가 뛰어왔다.
“야! 여기 있었네. 친구들이 기다려!”
그는 망설이듯 나를 한 번 바라보다가 친구를 따라나섰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대학생이 되었고, 어느 설날 저녁, 친구들과 함께 그가 우리 집에 들렀다. 나는 부엌을 오가며 다과상을 차리고, 그들이 돌아갈 즈음 그의 운동화를 가지런히 놓다가 그랑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고,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냥… 여기 있고 싶다.”
친구들이 취했다며 놀리듯 웃었고, 그는 비틀거리며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가끔, 검정 티셔츠가 유난히 잘 어울리던 그가 떠오른다. ‘그냥 여기 있고 싶다’ 던 그 말도.
그때, 내가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우린 달라졌을까.
하지만 묻지도, 듣지도 못했던 그 말들은
이제 오래된 사진처럼
빛바랜 기억 속에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