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한편
따로 또 같이 첫 문장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었다.
수업 중 심심할 때마다 내 연필을 뺏어가던 너에게
지우개를 숨기며 복수하던 그 시절,
우리는 싸우는 척, 토라진 척하면서도
늘 함께 붙어 다녔다.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익숙해서였는지 그땐 몰랐다.
어느 날, 너의 이사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는 웃지 못했다.
"그래, 잘 가. 딱히 아쉽진 않다?"
애써 장난처럼 말했지만 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마음 어딘가가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너는 먼 도시로 떠났고, 그날 이후, 학교가 꽤 조용해졌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다른 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스무 살.
장맛비가 요란하게 내리던 어느 오후,
고향에 잠깐 내려온 나는 우연히
작은 슈퍼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너를 만났다.
“너…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거의 몇 년 만이야?”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네가 웃을 때 나는 괜히 같이 웃었고,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날, 네 눈을 보는 순간, 왠지 이 거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애매하고 따뜻한 시간은 누군가가 너를 부르는 목소리로 끝나버렸다.
“다음에 또 보자.” 너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고, 나는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너는 다시 사라졌고 나는 또 그렇게 너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은 몇 년 뒤, 예상하지 못한 어느 명절 밤이었다.
설 연휴의 끝자락, 고향 친구들과 마신 술에 기분 좋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너는 내 집 앞 골목에 서 있었다.
너랑 눈이 마주쳤을 때 순간 놀랐지만 반가웠다.
술에 취한 네 눈동자에는 뭔가 오래 참고 있던 말들이 묻어 있었다.
“나, 가끔 너 생각했어. 비 오는 날이면… 괜히 그때 생각나더라.”
“나도. 근데 그때는 그냥 장난처럼 굴었잖아.”
“그래서 더 말 못 했지. 말하면 그게 끝날까 봐.”
그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녹았다.
그 밤,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너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 한편에
조용히 남겨진 그 기억만으로도
충분했다.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나는 잠시 너를 떠올린다.
그리움은 말로 다 하지 않아도
가만히 머무를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도 가끔 명절이 오고, 비가 오면 그날 밤 네가 있던 자리를 떠올린다.
어쩌면 말하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는 마음.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