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냥 장난이었다
<따로 또 같이 쓰는 첫 문장>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었다.
나만의 단어를 하나 만들어 쓴 것뿐이었다.
집에 돌아온 가족을 맞이하며 "잘 다녀왔어?" 인사하는 대신에, 외출했다 들어오며 "엄마 왔어, 집에 다들 있어?" 살피는 대신에, 나는 이렇게 외친다. "나나~" 공기 반 소리 반에 다정함 한 방울 섞어서 "나나~!"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안아주고 싶을 때도 "나나"가 등장한다. 인간의 언어와 다른 느낌에 "나나"를 말할 때는 행동도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강아지가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주인 얼굴을 핥는 것처럼, 목 끝까지 이불을 덮고 잘 준비를 마친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보드라운 팔에 난리 법석으로 얼굴을 비벼댄다. "나나..." 하고 속삭이며 체온과 체취로 아이의 존재를 온전히 느낀다. 아이는 강아지를 대하듯 나를 쓰다듬고는 포옥 안아준다.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으로 눈을 감고 앉아있는 아이 무릎에 슬며시 기대어, 잘 잤냐는 인사로 또 "나나~" 하고 같이 눈을 감아본다.
왜 이 장난을 계속했을까?
그건 나만의 사랑 표현이었다. 장난으로 포장한 진심이 습관이 되자, 나는 어느새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로 태어났다. 잔소리를 퍼붓는 엄마나, 엄하고 진지한 코치의 역할에서 벗어나 귀여운 강아지로 나를 변신시키는 마법의 주문이 바로 "나나"였다.
새롭게 장착한 "강아지 나나"의 정체성이 좋았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나"를 연기하며 나는 매일 작은 무대에 오른다. 평소의 나를 벗어나 사람이 아닌 동물로, 이것저것 재지 않고 유난스럽게 사랑을 표출하는 생명체가 되는 시간이 좋았다.
이 작은 행동의 이면에는 "나 같지 않은 나"도 괜찮아하는 "수용적인 나"가 있었다. 나다운 행동이 아니라며 선 긋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두는 "허용적인 나"도 있다. 이런 내 모습도 재미있게 맞받아쳐주는 가족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내가 이상하게 보일까 봐, 그래서 거부당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나를 내보여도 웃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서 누리는 행복이 있었다.
쓰지 않으면 퇴화하는 근육처럼 일상에서 반짝이는 순간을 발견하고 감탄하는 감각도 꾸준히 쓰지 않으면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가족들의 존재 자체가 기적으로 다가올 때, "나나~" 하고 건네는 장난은 하루를 살아내느라 내내 붙잡고 있던 사회적 자아를 놓아버리는 해방의 시간이자 그 날치의 감사와 행복을 마저 다 내려받는 보상의 시간이었다.
"강아지 나나"가 되는 것은 사랑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속내를 편하게 밝히지 못하는 나 같은 감정은둔형 사람에게 특별히 더 소중한 경험이다. 뒤에서 묵묵히 사랑하는 방식이 아니라, 경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부풀어 오른 사랑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가 삶의 태도가 되기 위해, 나는 또 내일 꼬리를 흔들듯 "나나"를 외칠 것이다. 활기차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매일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장난처럼 시작된 연기가 이제는 내 일부가 됐다.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한 장난이 "진지한 나"를 벗고, "마음껏 사랑하는 나"로 빚어가는 의식이 되었다.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고, 변화하고 정화하는 또 다른 내가 되어가는 일은 꽤나 만족스럽다.
훗날 아이들이 기억하길 바란다.
엄마는 책과 가르침보다
꼬리 흔들며 졸랑대던 사랑으로 우리를 키웠다고.
그렇게 엄마는 늘 우리 곁에 있다고.
행복은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강아지가 될 때 찾아온다. 자신이 만든 틀을 깨고 엉뚱한 존재로 탈바꿈하는 시도들이 예상치 못한 기회를 열어줄지도 모른다. 어설픈 연기에서도 길은 열릴 수 있다.
당신은 무엇으로 변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