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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화
찢어버린 날짜들에 대하여
by
페트라
Dec 29. 2025
을사년 한 해도 저물어 갑니다.
정년퇴직을 하고 자연인이 되어 생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어 귀가 순해지면서 외부요인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귀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소리를 좋게좋게 해석해나가는 능력도 생기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김형석교수님께서 말씀하신 화양연화의 시기를 누리면서 늘 감사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졸작(拙作) ‘무탈’(11.11 발행)에서 언급했듯이
별일없는 하루가 축복이자 무탈함이 최고입니다
.
그러면서도 아직도 감사를 놓치고 약간운 불만에 쌓여 사는 날도 있습니다.
‘
당연한 것에는 감사함이 생략되곤 한다
’는 말까지 써놓고도 말이죠.
흘러가는 매일매일에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 매일이 모여 달력 한 장이 되고 이제 열두장째를 곧 넘기게 됩니다.
오늘은 이 달력에 대한 글을 쓰려 합니다.
연말이 되면 집 안에서 가장 먼저 나이 드는 물건은 달력이지요.
지금의 달력은 손 안에 있습니다.
조용히 울리고, 슬쩍 알려주고, 우리가 잊어도 전혀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찢을 일도 없고, 넘길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이 몇 일인지 몰라도 화면은 굵게 표시되어 늘 정확합니다.
대신 기억은 남지 않습니다. 어제의 날짜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예전 달력은 성격이 있었습니다.
농협, 이발소, 약국 달력마다 분위기가 달랐지요.
집집마다 걸린 달력만 봐도 그 집의 취향과 사정이 보였습니다.
과거의 달력은 기다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시험 날, 소풍 날, 설날, 추석, 어린이 날을 손가락으로 세며 기다리게했지요.
그래서 날짜가 다가오는 기분이 있었습니다.
또한, 요즘 달력은 넘기기만 하면 되는 달력이 대부분이지만 예전엔 1년이 아예 한 장에 쓰여진 달력부터 지금같이 넘기는 달력, 그리고 하루가 한 장짜리인 달력같은 여러 가지 모양의 달력이 있었습니다.
저희 집은 지금과 같은 열두장짜리 달력 외에 365장짜리 달력이 각 방에 걸리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찢어야 하는 의식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달력을 찢기 위해서 형과 여동생보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저보다야 아버지, 어머니가 일찍 일어나시지만 아마도 저의 소확행을 위하여 남겨놓으신 듯합니다.
거기에도 큰 규칙은 있었습니다.
당일 날 아침에 뜯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전날 밤 미리 찢어두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괜히 새벽에 눈이 떠지면, 아직 어둑한 방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달력부터 찾았습니다.
오늘 날짜를 찢는 그 소리, ‘쓱’ 하고 종이가 떨어질 때의 묘한 쾌감, 그 소리가 하루의 시작 종소리였습니다.
달력에는 숫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열두장짜리 달력에는 동그라미 쳐진 날부터, 연필로 급히 적어둔 메모, 볼펜으로 꾹 눌러 쓴 약속 하나 하나가 남아 있어 그 집안의 사행활 정보(?)가 고스란히 메모되어 있습니다.
병원가기, 회충약 먹는 날, 누구누구 결혼식, 나락 공판, 반상회... 정겨운 단어들이 참 많았습니다.
내년에도 새 달력을 걸고 새해 연휴를 확인하고, 연초 계획을 세우겠지만, 제 마음속 어딘가에는 옛날에 했던 의식같은 한 장짜리 달력이 걸려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심스럽게 찢어야만 하루가 시작되던, 그 느린 시간의 달력 말이죠.
이제 연말이 되면 저는 달력을 선뜻 넘기지 않고 한참 바라봅니다.
우리는 또 한 해를 무사히 넘겼고, 날짜만큼이나 잘 버텨왔습니다.
모두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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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행복을 다집니다. 많은 경험은 아니지만 삶을 녹여 '일상 에세이'를 씁니다. 브런치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합니다. 스칸달룸은 걸림돌이지만 페트라는 디딤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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