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이들의 기싸움

눈치 보게 만드는 눈치 보는 사람들

by YearoftSea


그는 내게 자신이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자신의 성격이 예민하다는 말과 함께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을 서른 번은 넘게 말했다. 그는 늘 상대의 기분을 빠르게 캐치해서 피곤하다 했다. 물론 그는 실제로도 예민한 성격이 맞았다. 내가 감정기복이 심한 날이면 나의 눈치를 보느라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나?’하고. 그의 눈을 보면 모든 게 보였다. 나도 굉장히 예민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나는 종종 그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전라북도 시골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과 지내고 있었다. 그 마을이 우리의 첫 만남이 된 고마운 장소이기도 하다. 나에게 그곳은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이라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애인의 여자친구로 그곳에 가는 것은 조금 달랐다. 그곳에는 애인의 전 애인, 그전 애인의 가족들, 나의 애인의 가족들이 모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며칠간은 밝게 웃으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와 사귀기 전부터 알고 지낸 지인들이라 수다 떠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려웠다. 그들은 나를 고등학교 때 봐서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어른들과 다 같이 모여 있으면 몸이 굳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고 급격히 피곤해졌다.


방으로 함께 돌아와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어른들하고 같이 있는 게 싫어?” 나는 답했다. “그냥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았어. 생리 전이라 그런가 봐” 그는 나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어른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컨디션이 안 좋고, 나랑 둘이 있을 때는 컨디션이 좋아? 갑자기 아프지도 않고?” 나는 그의 말에 애써 밝게 웃었다. “오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같이 있으면 에너지가 생기나 봐!”하고.


“너 감정 다 티나. 어른들 이야기 듣기 싫어하는 거 다 티 난다고, 사람들은 몰라도 난 눈치가 빠른데 어떻게 그걸 모르겠어”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말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안 좋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나는 그곳에 사는 어른들의 이야기들을 듣는 게 종종 너무 힘들었다. 그들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의 애인이 아니었다면 반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의 행동이 애인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고개를 눌러도 공감이 어려울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영화 찍으려고 자기가 작품에 들어갔으면 미투를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 그냥 즐겨야 한다”이런 이야기를 듣고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나는 삼키지 못할 말을 삼켜서, 할 말을 못 해서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팠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눈치를 안 보이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사회생활을 하라는 게 아니잖아, 나는 그냥 너도 편하고 어른들도 너를 예뻐했으면 좋겠어. 너는 내 여자친구니까” 그리고 뒤이어 말을 이었다. “내가 눈치가 빨라서, 예민해서 그런 것도 있어. 난 타인의 감정을 잘 캐치하니까. 그리고 나는 이야기할 때 너를 살피니까. 네가 감정으로 싫은 게 드러나는 것도 이해해. 우리 누나도 그러니까. 너는 우리 누나랑 닮았어”


그는 자신의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성격이 예민하고 늘 자신을 눈치 보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를 소개해주고 싶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내가 자신의 누나가 닮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드디어 나의 예민함을 알아봐 주는 것 같아서 마냥 기뻤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의 누나는 그보다 더 예민하고 눈치도 많이 보는 사람일 것이라고. 눈치를 정말 많이 보는 사람은 자신이 눈치를 많이 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눈치를 본다고. 나는 눈치를 너무 많이 봐서 눈치 없는 척 행동하는 것을 터득한 사람이라는 걸 그는 몰랐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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