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내가 한건 다 로맨스였으니까

연애의 끝자락으로 향해가는 갈등의 시작 -

by YearoftSea

"너랑 있을때는 내 진짜 모습이 안나와"


애인이 헤어지기 일주일 전에 나에게 전화로 했던 말이다. 헤어지는 날에도 그는 네게 똑같은 말을 했다. 내가 자신에게 한 말이 너무도 큰 상처가 되었다고, 그 이후로는 너무 눈치가 보여서 자신의 본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말했다. 그가 말하는 본래 자신의 모습은 ‘장난기가 많고 밝은, 가벼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내 앞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는 데이트를 하는 날에 하루 종일 장난을 너무 많이 쳐서 “하루에 딱 5번만 장난쳐”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게 상처였다고 했다. 네게는 정말 예상치 못한 사소한 사건이라 놀랐다. 그 상황도 그가 네게 장난을 친 것처럼 나도 그에게 장난을 친 것뿐이었는데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네 게하는 것은 장난이고,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모든 게 진심이라 받아들이는 게 신기했다.


그는 늘 자신이 단순해서 서운했던 건 잊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는 단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와 비슷하게 갈등을 담아두고 참는 스타일이었다. 다 기억하고 아파하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참 나랑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린 정말 비슷하다.


나도 그와 만날 때 진정한 내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길지만, 가장 큰 압박은 ‘애정결핍’과 ‘우울증’이었다. 그는 애정결핍인 사람과 우울증인 사람을 정말 싫어했다. 호감 가는 상대에게 우울증의 기미가 느껴지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 말에 내가 “나도 고등학교 때 우울증이 있었어”라고 말했지만, “학생 때는 다 그렇지 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차마 그의 말에 몇 년간 나를 괴롭혔던 자해중독에 대해서, 20살 때 겪었던 공황장애에 대해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우울증에 걸리면 그는 나를 바로 떠나겠구나 싶었다. 그는 나의 밝고 맑은 모습을 사랑했고, 나는 그의 깊고 짙은 모습을 사랑해서, 우리의 사랑은 엇갈렸다. 사실 나는 깊고 어두운 면이 있는 사람이고, 그는 가볍고 밝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전 애인들은 다 애정결핍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집착이 너무 힘들었다 그랬다. 그러면서 내게는 “사랑을 온전히 잘 받는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그는 알까? 내가 늘 불안했다는 사실을. 그는 시골에 살아서 하루 패턴이 규칙적인데도 연락이 오지 않으면 불안했다. 데이트를 할 때도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행동이나 눈빛을 파악하면 심장이 무너질 듯 아팠다. “자기야”라고 부르다가도 내 이름, 혹은 너라고 부를 때에 공포, 돈이 없어지면, 내가 조금이라도 우울해지면 나를 버릴 것 같은 두려움. 갈등상황을 만들면 이별이 가까워진다는 압박감.


그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집착하고 싶지 않아서 모든 것을 절제했다. 연락 텀을 조정하고 자러 간다는 말에 더 쿨하게 보내주려 노력하고, 질투가 없다는 그에게 맞춰 나도 질투를 하지 않으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사실은 나도 그를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아이처럼 울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진짜 내 모습으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공허함. 그가 느꼈을 공허함이 뭔지 잘 안다. 그는 나와 사귄 지 200일쯤 지났을 때, 함께 지내는 친구들과 영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나에게는 자신의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영상 속에서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얼굴을 망가뜨리는 개그를 했다. 그 모습을 담아 친구들과 가벼운 비속어를 섞어가며 가볍고 웃긴 영상을 제작했다.


그 영상을 보고 마음이 심란했다. 사랑은 상대의 모든 모습들을 이해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라는데, 나는 막상 그의 가벼운 모습을 보니 표정이 굳었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은 당연히 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가 가볍기만 한 사람이라는 것에 종점을 찍는 영상 같았다. 가벼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가볍기만 한 사람이라서, 그게 고통이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화가 더 났다. 나는 그날도 생리가 밀려 그와의 미래를 상상하며 불안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영상에 대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답했다. “나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비속어 쓰는 모습이 싫어. 이 모습들은 미래에 우리 아기가 보면 창피할 것 같아, 오빠가 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는 이미지 같지가 않아.” 애인이 하는 일은 ‘신뢰’를 중요시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장이 갈 것이라는 우려가 깊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위한 우려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냥 그의 애인으로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의 가벼운 모습이 영상으로 보인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실은 그가 나의 문제를, 내가 생각하는 우리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뿐인데, 불똥이 거기로 튄 것뿐이었다. 그와 전화를 하면서 나는 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썼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최대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가볍게 웃는 반응이 돌아오자, 나는 더 더 수위를 높여 상처를 주려했다. 복수심이었다. 나를 공감해 주지 못하는 애인에게 내 공감능력과 따뜻함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친구들도 네가 싫어할 것 같다고 했다며 웃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럼 내가 싫어할 것을 알고 제작한 것이구나 싶었다. “아 그럼 내가 싫어할 거 알고 올린 거네” 나의 그 말을 시작으로 애인은 내 말에 상처를 받았다며 속상하다고 울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존중해 주지 못한다면 이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이미 그와 통화를 하는 내내 내 머릿속은 "헤어지자, 헤어지자, 그만하자" 모든 이별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이별'이 나오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아직 헤어질 자신은 없었다. 나는 스스로도 내가 이별을 너무 바라는 상태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별 이야기를 들으니 눈물이 미친 듯이 났다. 하지만 울면서도 '지금 못 헤어지면 더는 기회가 없을 텐데 어쩌지'싶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계속 사과를 했다. 물론 그 상황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더는 이 관계를 버틸 자신이 없어서 상대에게 하는 사과이기도 했다. 동시에 내가 그에게 진심으로 듣고 싶은 사과의 말이기도 했다.


그는 나의 울음에 당황을 했는지 잠시 말이 없어졌다.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이별을 하진 말자 했다. 자신도 영상에 확신이 없어 누나에게 물어보고 영상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지 말지 생각하겠다 했다. 갑자기 다시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내가 영상이 싫다는 건 이별 사유이고, 누나가 싫다는 건 중요한 의견이 되는 것이구나.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는 이별을 하는 날에도, 통화를 하면서도 내가 영상에 대해 말하며 상처 준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내가 임신에 공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또 한 것처럼. 우리 둘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받은 상처를 더 크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서로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할 수없었다.


나는 그 일에 대해서 그에게 미친 듯이 울면서 미안하다고 빌어도 보고, 사과의 편지도 썼다. 하지만 그는 꽤나 단호했다. 나중에는 그래. 상처가 그렇게 크다는데, 이제는 나도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이별하는 날에, 그는 지금이 자신의 한계라고 말했다.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솔직히 "고작" 이 정도가 한계인가 싶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의 말에 내가 받은 고통을 떠올렸다. 나는 진작 나의 한계치를 뚫고 너를 이해하고 있는데, 너는 고작. 고작 이 정도 사랑이었구나.


그의 말을 들으니 ‘그냥 나를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참 비참했다. 헤어지고 곱씹을수록 날이 갈수록 비참함이 커졌다. 그가 나에게 말실수, 혹은 상처를 주는 행동을 했을 때 나는 매번 괜찮다며 그를 다독였는데, 그는 나를 한 번도 용서해주질 못하는구나 싶었다.


내로남불을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이 자신의 행동은 전혀 돌아보지 못하는 게 웃겼다. 사실 나는 내로남불이 싫지 않다. 모든 인간은 다 그런 마음을 갖고 사니까. 그래서인지 헤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그가 밉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한건 다 로맨스였으니까.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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