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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크무슈 Feb 20. 2024

덕업일치에 관하여 - 절망편


늘 좋은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이 그저 징징대는 것으로 비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맥주회사로 출근을 시작했다. 분명 어제도 많이 마셨는데, 오늘 마셔봐야 할 맥주들이 네댓 병이나 된다. 소량으로 홀짝홀짝 마시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오늘 저녁에는 시장조사라는 거창한 이름의 회식이 있다. 어제는 팝업스토어에 다녀오며 꽤 마셨다. 내일은 음용 판촉이라며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마셔야 한다. 이대로는 내 간이 파업해 버릴까 걱정되어 맥주를 마시는 날을 캘린더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날이 조금씩 따뜻해질 때 즈음이면 맥주를 많이들 찾는다. 그만큼 내가 참석해야 할 행사가 많아진다는 것. 성수기 시즌에는 과장 없이 주중 4~5일은 맥주를 마신 날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만 마시고 싶어.


이직 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먼저 그날의 무게감을 뜨거운 물에 적당히 풀어 씻어낸다. 샤워를 끝내면 알맞게 차가운 컵과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 식탁에 앉는다. 먹고 싶은 음식은 그날 오후부터 미리 생각해 두는 편인데, 보통 요일마다 집 근처로 찾아오는 푸드트럭에 얼추 맞추어진다. 월요일이면 순대 트럭이 온다. 아주머니가 내 얼굴을 기억하고 난 뒤부터는 내장의 양이 조금 푸짐해졌다. 기분 탓이겠지. 그날의 음식과 맥주가 짝을 이룬 저녁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차분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는 의식 같은 시간.


맥주 회사로 출근하면서, 이런 시간을 전혀 갖지 않게 되었다. 그만 마시고 싶어서.


'좋아하는 것이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는 슬픔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내 삶을 지탱해 주던 것을 잃은 기분에 업무를 제외하곤 몇 달 동안 맥주를 끊어보기도 했다. (사실 불가능했지만) 이 밖에도 절망적인 순간이 셀 수 없이 많다. 내가 만든 맥주는 너무 맛이 없다며 블라인드에서는 욕설이 난무하고, 이걸 만든 사람은 맥주도 모르는 놈일 거라는 평가와, 앞으로 좋아하는 것이 꾸준히 싫어지게 될 것만 같은 일들을 해나가야 하고, 견뎌야 한다는 사실.


그저 매일을 잘 버티는 것으로, 예전 회사를 다니던 때와 같은 마음가짐이 되어간다.

어쩐지 잘 풀린다고 했다. 여길 왜 온다고 했을까. 그냥 미국 보내줄 때 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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