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패션 센스는 제로(Zero)

< 스물세 살, 2010. 12. 12. 일요일 >

by 장난감공장

< 스물세 살, 2010. 12. 12. 일요일 >

#동생 #패션 #츤데레

#형제자매의 옷차림이 맘에 안 들 때



사관학교에 다니다 보니 옷을 살 일이 잘 없었다. 학교에서 주는 옷을 상황에 맞게 입기만 하면 됐다. 수업을 들으러 갈 때는 반듯한 모자와 함께 약복을, 훈련을 받을 때는 전투복을,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체육복을 입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기 때문에 모든 생도들의 옷장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더 하고 덜 할 것도 없이 딱 옷장에 들어갈 몇 벌이 전부였다.



주말에 학교 밖을 나설 때면 반듯하게 다려놓은 정복을 꺼내 입었지만, 영 불편해서 집에 도착하면 바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부터 사복 패션의 시작인데, 너무 편하거나 과한 것이 특징이었다. 집에 있을 때면 학교 체육복과 다를 바 없는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약속이 있을 때는 외출복을 꺼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꼭 한 마디씩 했다. 휴가 나온 군인 같다고.



사실 군인이나 다름없는 신분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이 상했다. 나름 멋지다고 생각한 옷을 골라 입고 나간 건데, 내 패션이 그렇게 별로인가 생각했다. 기분 탓인지 여럿이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 무언가 어색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른 친구들은 어쩌면 그렇게 옷을 잘 입는 건지.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시내에 나가 옷을 몇 벌 더 사곤 했다.



내가 자주 가는 옷가게는 직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옷을 살 수 있는 마트 같은 매장이었다. 브랜드 옷가게에 갈 수도 있었지만 주말에만 입는 옷을 사기 위해 비싼 돈을 들이는 것이 아까웠다. 친구들은 옷가게가 몰려있는 지하상가에 가보라고 조언해줬지만, 1학년 첫 외박 때 동대문에서 된통 당한 기억 때문에 쉽게 발길이 가지지 않았다. 차라리 느긋하게 매장을 돌며 아무 옷이나 집어 바구니에 넣을 수 있는 편이 마음 편했다.



어느 주말, 여느 때처럼 고향에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가려는데 동생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불쑥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뭐냐고 물어보니 나중에 열어보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 봉투를 열었는데, 편지와 함께 만 원짜리 다섯 장이 들어있었다.


패션마트에서 즐거워하며 옷을 고르는 형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패션마트는 중학생이나 가는 곳이므로 이제는 이 돈으로 다시 세련 되지길 원한다. MLB 모자나 메이커 옷을 사도록. 개인적으로는 MLB 남색 마크 무난한 걸 사기 바람.



웃음이 나왔다.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말끔히 정복을 차려입었지만, 그전까지 입었던 옷이 무엇이었나 떠올려보게 했다. 몇 주 전 외출을 나왔을 때 동생이 편지에 적은 그 옷가게에서 산 옷이었다. 그걸 입고 가족들과 신나게 외식하고 돌아다닐 동안, 동생은 내 모습이 신경 쓰인 모양이다. 오죽하면 편지를 다 썼을까. 그렇지만 군인의 말투를 따라 하며 적은 편지에서 형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 패션이 좀 과했던 건 사실이다. 마네킹에 입혀 놓은 옷을 그대로 입고 다녔으니,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입을 수 없는 옷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사실 학교를 졸업하고도 내 옷 입는 감각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아내와 첫 데이트를 할 때 입은 빨간색 목폴라는 지금까지도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 그날의 옷차림 얘기가 나올 때면 아내는 '동생이 입으라는 대로 좀 입지 그랬냐'며 한마디 더 한다. 그러면서 매번 외출할 때면 슬쩍 내 옷을 코디해주는데, 다행히도 주변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무난한가 보다.



서랍에 넣어두고 한참 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편지를 동생에게 얘기했더니, 이제는 본인이 그 옷가게에 가서 옷을 사 입는다고 했다. 유니폼을 입고 일한 지 꽤 되었기 때문에 사복을 입을 시간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패션에 둔감해진 나이가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만약 동생이 예전의 나처럼 과한 옷을 입고 가족 모임에 나온다면 동생이 준 오만 원을 들고 같이 옷 하나를 사러 나가자고 해봐야겠다. 혹시 '형의 패션 센스는 아직도 한참 멀었어. 형이나 사 입어.'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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