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일기장에 '수'를 받던 날

< 여덟 살, 1995. 10. 16. 월요일 >

by 장난감공장

< 여덟 살, 1995. 10. 16. 월요일 >

#관심 #칭찬 #칭찬의 해로움

#누군가에게 칭찬 받으려 사는 삶에 지쳤을 때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들은 신나게 놀다 집에 들어오면 자기 전 일기를 썼다.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며 연필로 또박또박 글자를 적었다. 친구들과 공 놀이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엄마와 장을 보러 간 이야기. 거기에 그 일에서 느꼈던 감정을 적었는데, 재미있거나, 화났거나, 기쁘거나, 서운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면 전 날 적은 일기장을 가방에 챙겼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그것을 드리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 돌려주셨다. 다시 받은 일기 장에는 항상 "검"자가 빨간색 색연필 글씨로 적혀 있었다. 선생님의 글씨를 보며 뭔가 멋지다고 생각하고 다시 가방에 일기장을 넣었다.



어느 날, 돌려받은 일기장을 확인하다가 우연히 친구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검'자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처음 보는 글자인 '수'자가 적혀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친구에게 물어보니, "선생님이 내가 일기를 잘 썼다고 칭찬해주신 거야"라고 얘기했다. 알 수 없는 속상한 마음이 들어 집에 가서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 나도 '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엄마는 평소와 같이, 나를 데리고 동네 문구점에 가셨다. 알림장에 적혀 있는 준비물들을 함께 골랐다. 그리고 친구네 집에 들러서 책을 몇 권 빌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께 칭찬받는 일기를 쓰고 싶었지만, 엄마는 빌려온 책을 같이 읽어주실 뿐이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쓰려는데 엄마가 말씀하셨다.


"오늘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적어보면, 선생님께서 좋아하실걸?"



다음 날 선생님께 일기장을 제출하고,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일기장에 선생님이 무슨 글씨를 적어주셨을까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다시 일기장을 돌려받고 조심스럽게 가장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거기에는 '수'자가 적혀 있었다. 처음 받아보는 칭찬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뛰어가 엄마한테 일기장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도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정성껏 일기를 썼다. 내 일기장에 선생님의 칭찬이 가득할 것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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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을 받으면 그 일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일기장에 '수'를 받았던 기억 때문인지,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까지도 일기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일기 쓰는 것 말고도 청소나 인사를 잘하는 편인데, 어렸을 적 그것을 잘하면 칭찬 스티커를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조금 더 커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의 과목을 다른 과목보다 더 좋아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부서장의 '고생했다'는 한마디에 더 열심히 일했다. 좋아하는 과목은 성적이 좋았고, 칭찬받으며 한 일은 결과가 좋았다. 칭찬을 받으면 그 일을 좋아하게 되고, 그 일을 잘하면 다시 칭찬을 받는 선순환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한편으로는 칭찬이 주는 해로움을 생각해본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작가가 된 지 두 달 정도가 되었는데, 감사하게도 과분한 관심을 받는 글들이 생겼다. 핸드폰에 '조회수가 00000을 돌파했다'는 메시지가 울릴 때면 어렸을 때 일기장에 '수'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면 항상 다음 글을 적는 게 망설여졌다. 준비하던 글의 소재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괜히 힘을 주어 글을 써보지만 문장 하나 적는 게 어려웠다. 내 글이 관심받기를 바라며 꾸역꾸역 써내려 가면, 어김없이 사람들에게 잘 읽히지 않는 글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글은 나에게 칭찬받는 과목에만 집중하다 지나쳐버린 다른 과목을,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다 놓쳐버린 가족들과의 시간을 떠올려 보게 했다.



사실 일기장에 처음 '수'를 받은 이후로, 내 일기장은 기대와 달리 '검'자가 가득했다. 칭찬을 받기 위해 한 장을 빼곡히 적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다시 일기장을 읽어보면 '수'를 받지 않은 다른 날들도 나에게는 의미 있는 하루였다. 평범하게 지나간 날들 속에서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 그들과 같이 보낸 시간들이 한 사람을 만들고 성장하게 했다.



내가 다음에 적을 이야기도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남들처럼 멋진 직장을 퇴사를 하거나, 재테크에 성공하거나, 세계 여행을 다닌 경험은 없다. 다만 하루를 꾸준히 살아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친구들을 사귀고, 사춘기를 겪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바라던 일에서 실패를 맛보고, 일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일들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수'라는 칭찬을 받기보다는, 비슷한 고민을 해왔던 삶에 대해 공감을 받을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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