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다섯 살, 2012. 6. 12. 화요일 >
< 스물다섯 살, 2012. 6. 12. 화요일 >
#실패 #간섭 #마음이 불편해지는 위로
#누군가의 위로가 또 다른 짐이 될 때
비행을 그만두고 새로 시작한 일이 제법 익숙해졌다.
조종사의 길에서 멀어졌을 때는 과거의 모든 순간이 후회스럽게 느껴졌다. 허무한 마음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답이었을까. 이제는 사무실이라는 공간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실패의 기억은 점점 옅어지고 새로운 생활이 만족스럽다.
어느 날 선배 L이 저녁에 시간이 되는지 물었다. 나이가 비슷한 선후배끼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술자리가 늘 그렇듯 속 마음을 털어놓게 되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같이 일 한지 벌써 1년이나 되어가는데 얼굴 한 번 안 비출 거냐는 선배의 말을 마냥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회식 자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일 얘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분위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서로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사람들은 다들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구석에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내가 신경 쓰였는지 선배 L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막내가 처음으로 회식에 나왔는데, 사무실 생활은 좀 어떠냐는 질문이었다. 대화에 좀 참여하라는 신호였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갑작스러운 집중에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냥 '별 일 없이 지낸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조종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현재에 만족하고 살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좋은 선배님들도 만날 수 있었구요." 잠시 조용해지는 분위기에 뭔가 말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술자리에서 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가 계속됐다. 저마다 크게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선배 K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겠느냐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터라 그 선배를 따라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나와 나란히 선 선배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숨 쉬듯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비행훈련에서 떨어졌다고? 나도 그랬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질감이 들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무엇보다 따로 불러내 챙겨주려는 마음이 고마웠다. 선배는 "조종사가 되는 게 전부는 아니다", "더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 잠시 겪는 아픔이다"와 같은 말들로 나를 위로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의 말에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대화가 길어질수록 점점 불편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전날의 불편한 감정과 숙취를 그대로 가지고 출근했다. 멍하게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나를 따로 불러냈던 선배 K였다. 속은 좀 괜찮냐며 숙취해소 음료를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어제는 술기운에 이야기도 제대로 못해줬는데'라며 운을 띄웠다.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K 선배는 어제 못다 한 위로를 해주러 왔다. 나처럼 비행교육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삶의 계획 같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걸 듣고 있는 건 숙취에 두통을 참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잊고 살았던 비행교육에서 낙오되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제처럼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위로해주어 고맙다'라고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일방적인 위로보다 불편했던 건 소문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했던 이야기가 가십거리가 되어 회사에 돌았다. 처음에는 'OO에서 일하는 후배가 아직도 비행에 미련을 못 버렸대'라는 이야기였다. 그러고는 '곧 퇴사하고 비행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라더라'로 바뀌었다. 나중에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비행학교를 알아보는 중'이라는 소문으로 커져있었다.
퇴사를 할 거라는 소문이 잠잠해지고, 아무도 나의 비행훈련생 기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 대뜸 '비행을 그만두고 많이 힘들다고 들었어'라는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어떤 모습으로 살더라도 멋진 결정을 하길 바란다'는 식의 격려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아니에요, 저 후회도 없고 일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는 대답을 수 없이 반복하고 나서야 지나친 위로와 관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의 헤집어진 마음은 강제로 정리가 되어버렸다.
요구한 적 없으니 나에게 위로하지 말아 달라는 생각은 어쩌면 이기적이다.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직장에서 서로 관심을 주고받는 일은 흔하다. 내 상처를 남에게 들켰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내 마음의 온도를 일일이 확인해주길 바라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기대이다. 또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란 걸 안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려 한 선배가 밉지만은 않다. 그도 내 상황을 듣고 나서, 해줄 말을 생각하고 기회를 살피다 어렵게 다가와 위로를 건넸으리라.
그러나 조금 욕심을 부려 위로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우리는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이 힘들어도 일상 속에서 남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삭히는 과정 말이다. 그 시간만큼은 우리에게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지난 일에 대한 후회와 아쉬운 감정이 잦아들면, 어쩌면 위로조차 필요치 않을 수 있다.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해결책을 찾아주려 하는 대신 그저 공감을 해주면 좋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너도 힘내서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과격하다. 마치 '네가 어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라고 다그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다. 나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는 공감이면 충분하다. 그다음에 어떻게 살아갈지는 자신이 생각할 몫이다.
앞으로 살며 나와 비슷한 좌절의 경험을 한 동료가 있다면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싶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위치까지만. 그리고 그에게 시간을 좀 주고 싶다. 자신과 비슷한 시기를 보낸 한 사람이 열심히 살고 있고, 그 삶이 제법 만족스럽다는 걸 우연히 발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꽃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향이 전달되듯,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닿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