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용품을 가지고 출근한 신입사원

< 스물네 살, 2011. 9. 5. 월요일 >

by 장난감공장

< 스물네 살, 2011. 9. 5. 월요일 >

#신입사원 #실수 #좋은 사람들

#일을 처음 시작하던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비행을 그만두게 된 이후 지방의 한 비행기지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발령받은 사무실은 비행기 정비에 사용되는 수리부속을 관리하는 부서였다. 열대여섯 명 정도가 같이 일하는 그곳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물류를 관리하는 곳이다 보니 항상 전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배송지연 같은 이슈라도 발생하게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달라붙어 해결했다. 그곳으로 첫 출근 한 날도 쭈뼛거리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바쁘게 이슈를 해결하고 있었다.



전화받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신입에겐 사무실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이 나누는 대화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회의 도중 모르는 용어가 나올 때면 혹시 나를 쳐다볼까 싶어 슬며시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척하기도 했다. 아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내 자리는 바쁜 사무실과는 다르게 항상 조용했다. 작은 섬에 있는 것 같았다.



내 자리는 조용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깔끔하다 못해 휑할 정도였다. 사람이 한 명 더 온다고 해서 부랴부랴 준비해 놓은 듯한 컴퓨터 한 대와 키보드가 전부였다. 파티션도 없이 나란히 붙어있는 사수 선배의 책상과는 너무도 비교되었다. 그 자리에는 온갖 일정과 자료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고, 책상은 보고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을 돌려봐도 나 같은 책상은 없었다. 모두가 자기가 일하기 편하게 꾸며놓은 자리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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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숙소에서 쉬는데, 내일도 같은 모습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 책상은 나를 더 이방인처럼 만드는 것 같았다. 일단 내 자리에 무언가라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켜 근처의 문구점으로 갔다. 드라마에서 봤던 신입사원의 자리와 다른 동료들의 책상을 번갈아 떠올려 보며 이것저것 집었다. 두 손 가득 사무용품이 채워지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음 날 자리를 꾸미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연필꽂이에 각종 문구류들을 넣어 구석에 두고, 책상 위에는 포스트잇, 스테이플러를 올려놓았다. 다른 한쪽에는 책꽂이를 두고 몇 개 되지 않는 서류들을 어설프게 꽂아 봤다. 그리고 파티션에 자석을 붙이며 여기에 무엇을 붙여 놓을지 생각하고 있을 때, 반장님과 사수 선배가 출근했다.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자,


"어, 사무용품 나왔나 보네? 언제 신청한 거야?" 하고 인사를 대신하며 물었다.

"제가 어제 사 온 거예요. 책상이 너무 허전한 거 같아서.." 둘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이걸 네 돈으로 사 왔다고? 왜?"라고 재차 묻는 바람에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필요한 사무용품이 있으면 책자를 보고 신청을 하면 되었다. 그걸 몰랐던 것보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는 것이 더 창피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선배는 한마디 더 했다.


"프린터에 A4용지 떨어진 것 같던데 혹시 그건 안 사 왔니?"






그날 이후로 나는 부서에서 '열정 넘치는 신입'이라는 장난 섞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말처럼 열정은 넘쳤지만 실수가 끊이지 않았다. 이메일에 수신자를 잘못 지정하고, 첨부파일 없이 보내는 것은 다반사였다. 옆자리 선배가 알려준 엑셀 함수를 까먹어서 몇 번씩 물어보며 괴롭혔다. 보고서에 쓸 자료가 급해 사무실 동료들을 붙잡아 놓고 다 같이 야근을 한 적도 있다. 부서장이 복도에서 "요즘 일 잘하고 있지?" 하고 안부를 묻는 말에 그분을 10분 정도 복도에 세워놓고 아이디어를 늘어놓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때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와도 모자랄 마당에 손이 많이 가는 신입이라니. 선배는 업무의 기초부터 노하우까지 모든 것을 나에게 전수해주었다. 반장님은 하루에 한 시간씩 시간을 내어 업무 가이드북을 한 장 한 장 가르쳐 주셨다. 답도 없는 아이디어만 내는 나를 나무라지 않고 끝까지 경청해주시던 부서장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시 생각해도 신입 치고는 정말 과분하고 고마운 분들을 만난 것 같다.



사무용품을 사들고 출근하고, 실수를 연발해도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계시던 첫 사무실. 그 덕분에 뭐든지 열심히 하고, 혼나도 한 번 더 들이대 보는 태도를 갖게 된 것 같다. 가끔은 처음 일을 시작하던 그곳에서 받았던 관심과 배려를 잊고 지내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한 소리 들으면 '생각이 다르군'하고 벽을 쌓곤 하는데, 다시 그 시기의 열정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부서로 들어오게 될 신입에게, 사수 선배가, 반장님이, 부서장님이 해주신 것만큼 돌려주고 싶다. 내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신입이 또 다음 사람에게 잘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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