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네 살, 2021. 3. 1. 월요일 >
< 서른네 살, 2021. 3. 1. 월요일 >
#퇴사 #이직 #버티다 보면
#직장인 사춘기가 찾아왔을 때
요새는 퇴사 열풍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플랫폼에는 퇴사와 관련된 글이 넘치고, 이직을 잘하는 방법이 책으로 나온다. 퇴사를 하려는 이유는 다양한데, 한 설문에서는 상사의 잔소리와 대인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연봉 순이었다. 다른 설문에서는 2년 이내에 퇴사한 직장인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고 조사되었다. 2021년 대졸 취업률이 10년 새 최저라는 점을 떠올리면 무언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2년 이내에 그만두게 된다니.
나도 퇴사를 마음먹은 적이 있다. 사실은 입사를 하기 전부터 퇴사를 하고 싶었다. 사관학교에 다닐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으니, 시작도 하기 전부터 퇴사를 꿈꾼 셈이다. 그러나 무사히 장교로 임관해 일을 시작했고, 2021년 3월이 지나면서 공군에서 일한 지 만 10년이 지났다.
사실 10년이란 시간 동안 일을 그만두지 않았던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일에 치이다 주말에 집에 가서 죽상을 하고 있으면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한 직장에서 10년은 일해봐야 너의 선택이 잘 된 건지 잘 못된 건지 알 수 있다'. 격려와 위로라고는 전혀 없는 담백한 조언이었다. 왜 10년인지 설명도 없으셨다. 그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은 선택이었는지 알고 싶으면 버텨보라는 이야기였다. 이 말은 묘하게 나를 자극해서 오기가 생기게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니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게도 직장 밖에서도 만나고 싶은 동료들을 여럿 만났다. 미국 정부, Lockheed Martin, Pratt & Whitney 같은 회사들과 함께 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여유를 찾아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소중한 아이를 만났다.
무작정 '입사하고 10년은 일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건 '힘들면 당장이라도 직장을 그만 두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과격하다. 직장을 꾸준히 다니지 않더라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프로젝트에서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다. 이직을 자주 한다고 가정을 꾸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특히 요즘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살면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건 왠지 성장을 멈추는 것과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한 직장에 10년은 다녀봐야 할까?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고 나자 비소로 입사 초기에 너무도 쉽게 흔들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배의 잔소리, 동료들과의 갈등으로 하루를 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야근을 할 때면 친구가 다니는 회사 이야기가 떠올라 내가 하는 일에 불만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처음 몇 년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내가 일하고 받는 급여가 적당한 것인지, 상사가 나에게 하는 말이 조언인지 잔소리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동료들과 지내며 겪는 갈등이 내 마음이 좁아서인지 주변 사람들이 유별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조언을 해준 사람은 감사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예민한 사람과 같이 일해주는 동료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이직에서 오는 연봉의 상승이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연봉 1천만 원 인상에도 이직을 결심하는 모습은 흔하다. 그 돈이 결코 작거나 값어치가 없는 게 아니다. 연봉이 오르면 대출 이자의 부담에서 숨통이 트일 수도 있고, 아이를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또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급여가 내 가치를 증명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봤을 때 이직을 통해 오르는 연봉이 현재 직장에서 쌓을 수 있는 커리어를 커버하기에 충분한 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 네트워크의 가치가 크다고 느꼈기 때문에 당장 직장을 옮길 이유가 없었다. 자연스레 지금이 아니면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도 사그라들었다.
워라밸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이다. 주 5일제가 만들어낸 '불금'도 시시해졌을 때, 워라밸은 상당히 중요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파이어족의 등장으로 워라밸 때문에 직장을 옮긴다는 것 자체가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앞글자를 딴 FIRE족은 평생 일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것에서 나아가 어떻게 하면 조기 은퇴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런 면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놓인 선택지는 이제 두 가지다. 직장 생활에서 여유를 찾을 것인가, 경제적 자유를 얻고 은퇴한 삶을 즐길 것인가.
워라밸을 꿈꾸는 근로소득자로 살기를 결정했다면 그것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회사마다 업무의 강도가 다르고, 개인의 여가를 존중해주는 문화도 다르다. 그러나 가끔은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을 떠올려 보게 된다. 지금까지 거절하지 못한 회식, 야근을 생각해 보면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이유가 강했다. 좋은 사람인 동시에 일에서는 여유롭고 싶은, 조금은 모순된 생각이 스스로의 삶을 힘들게 했다.
만약 파이어족이 되기를 결심한다면, 주변의 도움 없이 그것을 위한 시드머니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지금 다니는 직장생활을 이어나갈 이유가 충분하다. 이직에 쓸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새로운 스펙을 준비하기 위한 학원비 한 푼이 아쉽다. 꾸준히 들어오는 수입과 익숙한 생활 패턴은 시드머니를 만들기에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탄탄한 경제적 파이프라인이 구축되었을 때, 그때는 직장생활을 이어갈지, 떠날지를 두고 선택할 수 있다.
세상은 쉽게 바뀐다. 4차 산업혁명이 제법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학을 갈 때 유망하다는 직종이 20년이 채 되기 전에 유명무실해지는 경험을 한다. 가라앉는 배에 남아 있어선 안 되겠지만 조바심에 못 이겨, 동료 선원들이 미워 보여 배를 옮겨 타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지금 타 있는 배에서 조금은 느긋하게 주변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항로를 변경해도 좋고, 다른 배로 갈아탈 준비를 해도 좋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결정을 내릴 충분한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 직장에서 10년은 생활해보라는 조언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성숙하지 못한 생각으로 쉽게 퇴사나 이직을 결정했더라면 새로운 곳에서도 항상 남에게 휩쓸려 다녔을 것 같다.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늘 새로운 시작만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일에 쓴 시간만큼 가족에게 소홀했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비로소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다.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다음 10년이 지난 후의 모습이 기대된다.
<기사 출처>
김호준, 직장인 퇴사 이유 2위는 '사람 스트레스'…1위는?, 이데일리, 2020. 12. 5.
박윤구, '요즘 애들' 절반 2년내 퇴사 "돈보다 불만이었던 건…", 매일경제, 2021. 11. 10.
남궁민, '코로나 취업한파' 현실로…대졸 취업률 65% "10년새 최저", 중앙일보, 2021.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