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두 살, 2019. 10. 20. 일요일 >
< 서른두 살, 2019. 10. 20. 일요일 >
#사람 관계 #직장생활 #내 모습 받아들이기
#나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살고 있을 때
직업 특성상 스무 살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다. 짧은 '운동형' (예전에는 스포츠머리라고 하던) 스타일을 계속 유지했다. 중간에 모히칸, 투블럭 등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다. 가끔 이대팔 가르마가 떠오르는 '간부 표준형'머리를 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억센 내 머리카락이 말을 듣지 않아 포기했다.
하루는 출근해 복도에서 동기를 만났는데, 뭔가 말끔해진 게 느껴졌다. 인사를 하며 유심히 보니 머리 스타일이 바뀌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야근한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단정하게 넘긴 머리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자꾸 머리 쪽으로 향하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동기는 "주말에 바버샵에 다녀왔다"라며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재미있으니 한 번 가보라고 추천했다.
바버샵은 수염을 기른 마초 같은 남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런 수염도 없었고, 무엇보다 10년 이상 된 머리 스타일을 바꾼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동기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바버샵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버샵을 방문했고, 처음 그 문을 열였을 때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스킨과 헤어 제품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었지만, 수건은 깔끔하게 접혀 있었다. 사각거리는 가위 소리가 재즈 음악과 잘 어울렸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도 바버샵에 다니고 있다.
바버샵에 다니며 내가 알게 된 헤어디자이너는 두 가지로 나뉜다. 머릿결대로 자르는 사람과 그것과 반대로 손질하는 사람이다. 나는 못 생긴 두상 탓에 머릿결이 앞으로 쏠린다. 이마도 좁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이마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샵에 가면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이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그렇지만 그들이 추천하는 스타일은 제각각이다. 누구는 앞머리를 내려 이마를 가리라고 하고, 누구는 뒤로 쓸어 넘겨 드러내라고 한다.
처음에 간 바버샵의 디자이너는 꽤 섬세한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넘기며 한참을 대화한 뒤에야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바리캉(bariquant) 보다 가위를 더 많이 사용했다.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고 머리가 완성되었다. 두상과 가마 위치까지 고려해 가르마를 타고나니 제법 세련돼 보였다. 10년 만에 바꾼 머리 스타일이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쉽게도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바버샵을 옮겨야 했다.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새로 간 곳에서 내가 이사보다 먼저 한 일은 새로운 바버샵을 찾는 일이었다. 무작정 가까운 곳부터 가보기 시작했다. 처음 다니던 샵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대화가 오고 가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머리 손질이 끝나고 훤히 드러난 이마를 보았을 때, 그 어색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디자이너는 "이게 요새 유행하는 스타일"이라고 얘기했지만 벌거벗은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바버샵을 다섯 번이나 옮겼지만 모두 실패했다. 트렌드라는 게 뭔지, 바버샵을 바꿀 동안 내 짧은 머리는 들쭉날쭉 해져갔다. 그마저도 모두 이마를 드러내는 바람에 집에 오면 바로 머리를 감아 버렸다. 마지막에 간 일곱 번째 바버샵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기대를 크게 하지 않고 있었는데, "무리하게 머리를 뒤로 넘기지 마세요. 절대 안 넘어가요 그거." 듣고 싶은 소리였다. 처음 갔던 바버샵과 같은 머리 스타일로 돌아오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드디어 단골집을 찾았다.
사실 짧은 머리를 유지하며 스타일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다. 아무리 바버샵에 다닌다고 한들, 남들에게는 그저 이대팔 머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청담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내 머리 스타일이 어떠냐"라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그 돈을 내고 바버샵에 다닐 거면 그냥 자기 샵에 와서 자르고 가라고 했다. 전문가가 봐도 별 다를 것 없는 모양인 것 같다.
하지만 바버샵을 일곱 번이나 바꾸면서 알게 된 게 있다. 머릿결을 거슬러 스타일을 내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샵에서 머리를 손질한 날에는 디자이너가 드라이를 해주고, 기름을 잔뜩 바르기 때문에 왠지 그럴싸해 보인다. 도저히 넘어갈 것 같지 않던 머리도 단단히 고정돼 거울에 비친 모습은 다른 사람 같다. 괜히 멋있는 표정을 지어보고 싶다. 하지만 집에 와서 머리를 감고 나면 금방 동충하초 같은 모습이 되고 만다. 다시 그 모양을 만들려고 아무리 드라이를 하고 머리에 뭔가를 발라도 어색해져 버린다.
무리하게 머리를 넘기려 하지 말라던 디자이너를 떠올려 본다. 그 디자이너가 혹시 내 성격까지 알아차린 게 아닌가 싶다. 이마가 좁으면 속이 좁다는 말처럼 나는 속이 콩알만 하다. 하지만 그 성격을 숨기고 마음 넓은 척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견디지 못하는 때가 반드시 생겼다. 차라리 내 마음이 유리 같다는 걸 알리고 그들과 지냈다면 적절한 선에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앞머리를 슬며시 내려주는 디자이너는 마치 '마음이 좁으면 억지로 넓은 척하지 말고 그런대로 사람들과 지내보라'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망친 머리야 한 두어 달 지나면 회복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이 있다. 사람과 관계가 그렇고, 직업이 그렇다. 나에게 맞지 않는 관계를 맺고 나면 시간이 지나도 되돌이키기 어려울 때가 있다. 또 나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가진다면 금세 지쳐서 퇴사나 이직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머리가 어떤 건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럴싸한 남의 모습을 그냥 한번 따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망친 머리 때문에, 관계 때문에, 잘못 들어온 직장 때문에 인생의 시간을 허비하는 건 아무래도 아깝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맞는 바버샵을 계속 다녀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