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을 때

< 열여덟 살, 2005. 11. 25. 금요일 >

by 장난감공장

< 열여덟 살, 2005. 11. 25. 금요일 >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직업 고민

#하고 있는 일에 염증을 느낄 때



운동장 구석에 있는 철봉에 매달려 있는데 멀리서 한 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아리 친구였다. 늦은 생일 선물이라며 무언가를 건네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흥미롭게 포장을 풀러 보니 'Mr. Green'이라고 쓰인 플라스틱 컵이 들어있었다. 두 달도 더 지난 생일을 챙기는 것도 이상한데, 고작 플라스틱 컵이라니. 교실에 가서 박스 구석을 살펴보니 잔디 키우기 화분이라는 설명서가 하나 놓여 있었다. 싱겁게 웃으며 씨앗에 대충 물을 적셔 교실 창가에 두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던 날, 창가 구석에 놓아둔 잔디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플라스틱 용기 속 솜뭉치에 뿌리를 내린 연두색 새싹들이 뾰족뾰족 솟아 있었다. 앙증맞은 그것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삭막하던 교실에 신선한 분위기를 주는 것 같았다. 잔디를 오래 두고 키우고 싶은 생각에 조금 더 큰 화분에 옮겨 심어보기로 했다.






잔디를 들고 학교 앞 꽃집으로 갔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항상 향긋한 냄새가 나던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앞치마를 예쁘게 두른 주인이 나를 맞이했다. 머릿속에 그렸던 화분을 말하며 잔디를 옮겨 심을 것이라고 하니 그는 잔디를 거칠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연약한 싹들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바람에 그것들이 다 뽑혀버릴 지경이었다. 주인은 귀찮다는 듯 잔디를 몇 번 더 만지다 옮겨심기가 힘들 거라고 말했다. 화분을 팔 생각이 없는 건가 싶어 이유도 묻지 않고 그 가게를 나와 버렸다.



그 옆의 꽃집으로 들어갔다. 인터넷에서 꽃에 관련된 사진을 검색하고 있던 주인이 나를 맞았다. 꽃집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정장 차림을 하고 있던 그는 내 계획을 듣고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잔디의 종류부터 재배 방법까지 한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고는 왜 굳이 잔디를 화분에 옮겨 심으려 하냐고 핀잔주듯 말했다. 그럴 거면 왜 그렇게 지식을 늘어놨는가 하는 생각에 반발감이 들었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 물으니 대답이 없었다.



그냥 학교로 돌아갈까 생각하다 마지막으로 한 곳에 더 들르기로 했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꽃집이었다. 꽃가위를 손에 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손님으로 보였을 주인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앞선 두 가게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라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잔디를 옮겨 심게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태껏 잔디를 옮겨 심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거절의 표시인 줄 알고 몸을 돌려 가게를 나서려는데, 주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축 늘어진 잔디를 조심스럽게 만져보더니 한 올 한 올 엉켜있는 뿌리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와 꽃집 주인은 나란히 앉아 수십 개의 잔디를 솜에서 떼어냈다. 잔디 화분이 어디서 났냐고 물었다. 생일 선물로 받았다고 했더니, 자신도 친구에게 받은 화분을 키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꽃다발만 좀 만들면 될 줄 알았는데 화환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주말도 없이 일하게 된 지 꽤 되었다며 하소연을 했다. 그래도 이 일이 즐겁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려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작업대 위에 놓인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보니 자습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학교에 돌아가야 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면 꽃집 주인은 몇 시간이고 그 작업을 계속할 기세였다. 그는 잔디들을 주워 담고 있는 나에게 적당한 화분과 흙을 추천해줬다. 그러면서 남은 잔디도 소중히 떼어내 화분에 잘 옮겨 심어 보라고 당부했다. 학교에서 가서 비닐을 자르자 기분 좋은 흙향기가 느껴졌다.




흔히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그것을 즐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생각했다. 꽃이 좋아 꽃가게를 연다면 정말 완벽한 직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즐기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가 금세 와닿았다. 좋아했던 일은 더 이상 흥미롭지 않은 반복적인 일이 되고, 경제 활동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여행이 좋아 가이드가 된 친구도, 글 쓰는 게 좋아 작가가 된 지인도 그랬다.



잔디를 왜 옮겨 심으려 하냐고 손님을 돌려보낸 꽃가게 주인들이 이해된다. 치열한 생업 전선에 서서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하루 종일 똑같은 꽃다발 수십 개를 만드느라 지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잔디를 들고 찾아온 손님이 반가웠을 리 없다. 꽃가게 주인의 태도에 실망한 과거의 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의 내가 꽃가게 주인이 되더라도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다. 그들에게서 감정 없이 일하는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항상 설레기만 하는 일은 없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산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잔디 화분을 같이 만들어주던 꽃가게 주인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늘 맴돈다. 일을 즐기지는 못해도 가족과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데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지친 일상에 귀찮은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잠시 딴짓할 여유는 떼어 놓는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걸 느낀다. 손님과 대화 중에 우연히 일을 처음 시작하던 날의 감정이 떠오를지 모른다. 매일이 즐겁지는 않아도 그 정도면 아주 만족스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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