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시생 아내를 둔 남편입니다.

< 서른네 살, 2021. 7. 26. >

by 장난감공장

< 서른네 살, 2021. 7. 26. >

#아내 #공시생 #경력단절

#다시 사회로 나아가려는 배우자와 함께일 때



나와 결혼하며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꿈 많은 대학생이었다. 도서관에서 밤샘을 할 정도로 학교 생활에 열정적이었다.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었고, 해외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취업률이 최저라는 기사가 연신 나오던 해에 아내는 OO회사 신입 공채에 합격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7년이라는 시간을 들인 결과였다.



나는 그런 아내가 신입사원이던 시절 철 없이 프러포즈했다. 아내가 회사 생활의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여유도 주지 않은 채 '결혼해서 같이 살자'는 막무가내식의 제안이었다. 당시에 나는 지방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이직' 또는 '퇴사'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망설임 끝에 아내는 '신혼부부가 떨어져 지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아내는 1년 간의 짧은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나를 따라 지방으로 내려왔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모든 게 좋을 것 같았던 결혼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삐그덕거렸다. 외벌이 가정이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돌던 아내는 연고도 없는 곳에서 지내는 것을 힘들어했다. 남편이 퇴근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삶은 행복한 결혼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났고 육아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결혼 생활 5년 차, 아이가 두 살이 되던 해 우리 가정에 이슈가 생겼다. 아내가 다시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선택한 방법은 공무원 시험 준비였다. 그런 아내의 말에 걱정이 앞섰다. 나는 매일 야근을 해야 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아이는 어린이 집에 다니기에 너무 어렸다. 그러나 곧 이런 걱정들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아이의 입장에서만 생각했을 뿐 그동안 가정을 위해 헌신한 아내의 삶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공시생 생활은 시작되었다. 야근이 끝난 남편의 저녁을 챙겨주고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공부할 시간이 주어졌다. 하루에 채 세 시간도 공부하지 못한 날이 많았다. 잠이라도 충분히 자야 하는데, 아이가 깨서 칭얼대면 그마저도 어려웠다.



아내가 밤잠을 설쳐가며 공부하던 생활도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타지로 인사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시험까지는 6개월이 남았는데, 이사를 하고, 또 그곳에서 적응하며 시험을 준비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아이를 처가댁에 맡기기로 했다. 생이별이었다. 아이는 지방에, 아내는 친척들이 있는 수유에, 나는 직장이 있는 성남에서 살게 되었다. 말 그대로 이산가족이 되었다.



아내는 새벽같이 일어나 노량진의 고시학원으로 향했고, 공부를 마치고 늦은 밤 귀가했다. 주말이면 아이를 만나러 나와 같이 친정으로 향했다. 왜 부모와 떨어져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는 아이를 달래다 보면 어느새 일요일이 되었다. 아이가 잠들면 머리맡에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갔다.






노력의 대가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아내는 시험에서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했다. 공무원 시험의 경쟁이 심해 한 문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뉴스로만 들었다. 우리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아쉬운 마음뿐만 아니라 알지 못할 여러 감정들이 스쳤다. 남편의 마음도 이러한데, 당사자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어 별다른 위로를 할 수도 없었다.



아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꽉 물었다. 몇 개월 공부해서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는데, 1년을 공부할 수 있다면 합격할 것 같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런 굳은 마음으로 다시 공시생 생활을 시작했다. 먼저 우리 가족은 다시 한 데 뭉쳤다. 이산가족 생활을 정리하고 같이 살며 각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이 되면 아이는 어린이집으로, 아내는 독서실로, 나는 일터로 향했다.



그 시간 동안 아내는 어떻게 해서든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오롯이 공부하는 데 썼다. 가족 모임이나 지인과의 만남이 있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꼭 지켰다. 이동하는 차에서도 공부하고,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작은 불빛을 켜고 책을 보았다. 아이에게도 소홀하지 않았다. 아이가 잘 때 같이 자고, 먼저 일어나서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 날이 다가왔다. 우리 가족은 아내의 시험장이 있는 OO시로 향했다. 긴장한 모습으로 고사장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내도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아이는 두 시간 남짓 되는 시간을 고사장 근처에서 서성였다. 아내가 나왔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그동안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공부하느라 애썼다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해서 미안했다고 서로를 조용히 위로했다.






결과가 발표되었다. 아내는 OO시 지방직 공무원에 최종 합격했다. 꿈만 같았다. 아이가 어설픈 말로 '엄마 고생했어요. 축하해요.'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셋이 떨어져 지내던 시간, 조금은 서로에게 예민해졌던 날들이 모두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내는 이제 한 사람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에 더해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다시 사회로 나가게 되었다. 새 출발이다.



가끔은 직장을 그만두고 같이 살자고 하던 철부지 시절의 치기 어린 행동이 후회된다. 우리 사전에 주말부부란 없다며 서로 없이는 못 살 것 같던 그 시간도 소중하다. 하지만 그날의 프러포즈 때문에 아내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사회로 나가는 데 6년이 걸렸다. 6년은 나의 아내, 4년은 아이의 엄마, 그리고 2년은 공시생으로서 살았다. 특히 공시생이던 2년은,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그저 우울했던 시간으로 기억되었을 치열한 날들이었다.



가정을 꾸리기 전에 여성의 경력 단절이나 재취업의 어려움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내는 결혼 생활이 어떤 건지, 엄마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그 역할이 주어졌을 때 감내해야만 했다. 사회에서 '나'라는 사람이 잊혀 간다는 마음을 본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도 가정에 크고 작은 이슈가 생길 때면 아내의 공시생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때의 노력과 간절함이면 뭐든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도, 나도 용기를 갖게 된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지금도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들이 새벽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고 있다. 또 누군가는 가족들이 잠든 시간에 몇 년 만에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제출하고 있다. 사회로 다시 나가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는 그들과, 그 가족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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