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과 어색한 1박 2일

< 서른두 살, 2019. 2. 24. 일요일 >

by 장난감공장

< 서른두 살, 2019. 2. 24. 일요일 >

#장인어른 #아버님의 꿈 #가족 먼저

#장인어른과 친해지고 싶을 때



아내의 외가 쪽 식구들이 다 같이 여행을 갔다. 남자들은 빼고, 여자들끼리만 가는 여행이었다. 아내의 외할머니부터 이모들, 그리고 사촌 자매들까지 3대가 모여 단체로 맞춘 분홍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마치 공항에 핀 벚꽃 같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사진 찍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여행의 설렘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아내와 아이를 공항에 내려다 주고 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나와 같은 처지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장인어른. 뭐 하고 계신지 궁금해 전화를 드리니 금방 받으셨다.


"아버님, 뭐하고 계세요?"

"나 그냥 있어~"

"그럼 오늘 저랑 저녁 같이 드실래요?"


갑작스러운 대시에 아버님은 잠시 머뭇거리시며 "왜, 이쪽에 올 일이 생겼어?" 하고 물으셨다. 나는 혹시 선약이 있으셨거나, 모처럼 여유를 즐기시려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장인어른과 단 둘이 있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그냥 혼자 저녁 먹어야 하는 사람들끼리 같이 저녁 먹을까 해서요!" 하고 말씀드렸다. 전화기 너머로 '허허허'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지금 출발합니다~" 하고 곧장 처가댁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려 처가댁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장인어른과 함께 집 앞에 있는 식당에 갔다. 메뉴가 부대찌개와 낙지볶음밖에 없는 곳이라 주문이 금방 끝났다. 그때부터 어색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시킬 메뉴도 없는데 둘은 메뉴판을 들여다보다가 아버님이 먼저 '이쪽에 볼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다시 한번 물으셨다. 나는 '네, 아버님 혼자 저녁 드실까 봐 걱정돼서 왔죠.'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잠시 뿐이었다.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아버님, 소주 한 병 시킬까요?"

"그래 그게 좋겠다."


둘은 그렇게 어묵 반찬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서로 이런저런 근황을 묻다가 자연스레 최근에 개업한 식당 이야기가 나왔다. 아버님은 원래 하시던 일을 정리하시고 시장에서 식당을 여셨는데, 지난 설에 일을 도와드리며 보니 장사가 제법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버님의 말씀에 뭔가 불편한 기색이 느껴졌다.


"하시던 일 정리하시고 식당 하신다고 하셨을 때 좀 의외였어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농장 시작하실 줄 알았거든요."

"그걸 기억하네? 농장을 하고 싶었지.."



재작년 장인어른 생신 때 가족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천변을 걷다가 잠깐 나왔던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을 정리하시면 무얼 하고 싶으시냐고 물었고, 아버님은 고향 근처에 가서 조그마한 농장을 하고 싶다고 하셨었다. 가족들이 언제든지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오두막을 지을 계획도 가지고 계셨었다.



"마지못해 하는 거지" 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늦둥이가 이제 대학에 들어갔으니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금전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을 해야 했다는 것. 가장으로서 아버님이 놓인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을 때, 아버님은 속에 있는 말들도 터놓기 시작하셨다. 일찍 부모를 여의시고 어렵게 결혼을 승낙받으셨던 순간, 세 자녀를 기르면서 부족함 없게 해주고 싶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던 시절, 그리고 지금 내 아내인 큰딸이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한 것 같아 섭섭했던 감정. 그리고 그 딸이 아이를 낳아 기를 때 힘든 순간에 가까이서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픈 마음.


가족사진.png
노인.jpg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사위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서, 내 앞에 마주 앉은 한 가장의 삶에 공감이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오롯이 가족을 위해 쓰셨고, 아직 그 삶은 진행 중이셨다. 나는 그런 가장에게 "그래도 꼭 하고 싶으셨던 일을 잊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결혼생활 3년도 되지 않은 녀석이 그것이 30년은 훌쩍 넘은 분께 드리기에는 그저 속 모르는 이야기일 수 있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식당은 어느덧 한산해졌고, 둘은 밖으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술기운이 돌았지만 집에 와서도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 마시며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식당에서처럼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남자들끼리 모여 나누는 밤늦은 시간의 수다였다. 한참을 웃다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인어른은 그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운영하시던 식당을 접으셨다. 그리고 농장을 시작하셨다. 늦둥이 처제는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농장 옆 오두막에서는 벌써 많은 추억이 쌓이고 있다. 가족들을 보살피느라 지나버린 세월 속에 무엇이 남았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버님은 아마 그 시간만큼의 추억이 여기 남아있노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 이제 그 삶을 응원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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