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현장으로 모이라고 해

< 스물여덟 살, 2015. 10. 15. 목요일 >

by 장난감공장

< 스물여덟 살, 2015. 10. 15. 목요일 >

#익숙함 #실수 #현장에 답이 있다

#익숙한 일을 겉넘다 크게 실수했을 때



그날도 숫자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비행장에서 사용한 모든 수리부속의 결산을 하는 시기였다. 어떤 부품들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해 내년 구매 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지만, 얼마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면 결코 고되기만 한 야근이 아니었다.



사건은 2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업무 담당자인 나는 수리부속 결산을 진행하기 위해 계획안을 꾸미고 있었다. 결산 업무는 세부 작업들로 나눠져 있고, 다른 부서에 협조를 받아야 할 일들이 많았다. 수리부속을 발주하고 전산으로 관리하는 매니저들과 창고 근무자 등 여러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일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재고조사'는 창고 근무자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창고에 보관된 수 만 가지 부품들의 재고를 일일이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같다면 계획안을 작성하기 전 현장에 찾아갔을 것이다. 담당자들을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협조할 사항을 체크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런데 매년 반복되는 일이기도 했고, 연말이 될수록 일이 몰리는 탓에 신경을 크게 쓰지 못했다.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현장 방문을 생략하고 사무실에 앉아 세부 작업들을 임의로 쪼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들에 업무 담당부서를 지정하고, 책상에 놓인 달력을 보고 대충 마감일을 정했다. 그렇게 계획안 하나를 뚝딱 만들어 연관 부서로 발송하고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창고에 협조를 요청한 기한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진작에 재고조사 결과가 나에게 넘어왔어야 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현장으로 갔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곳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한 달 전부터 창고정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버릴 지경이었다. 상황을 보니, 수리부속 결산을 위해 해야 할 '재고조사'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게 뻔했다.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부서장님께 말씀드려야 했다. 기어가는 소리로 결산 마감일까지는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는데, 아직 재고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부서장님은 그 말에 펄쩍 뛰셨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동안 다들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냐"며 호통을 치셨다. 계획안을 올릴 때 현장 담당자들과 상의하지 않았음을 솔직히 말씀드렸다. 부서장님은 잠시 숨을 고르시더니 "모두 현장으로 모이라고 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간신히 대답을 하고 나서 자리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전화를 돌렸다. "저기, 다들 창고로 좀 와주셔야겠는데요."



모두가 현장에 모였다. 부서장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그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특히 아이템 매니저들은 할 말이 많았다. 재고조사는 창고에서 할 일인데 왜 자신들까지 현장에 나와야 하냐는 볼멘소리가 이해됐다. 그러는 사이 부서장님이 창고에 도착했다. 각자 담당하는 품목들의 재고를 확인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자 아이템 매니저 몇이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담당하는 품목은 5,000종류나 됩니다. 그걸 다 확인하다가는 밤을 새야 해요", "정비 작업장에서 급하게 요청한 수리부속이 있어 사무실을 오래 비울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 말에 사람들이 동조하려 할 때 부서장님은 한 저장 빈 (Storage bin) 앞으로 가서 섰다. 그러고는 제일 아래의 부품 상자를 열어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시작합시다".



오후에 시작된 재고조사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에 급한 일이 있는 직원들은 창고 근무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음 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뒤 사무실로 돌아가기도 했다. 사무직, 현장직 할 것 없이 모두가 창고를 샅샅이 뒤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일은 자그마치 일주일이나 계속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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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불편함을 끼친 것을 사과하기 위해 현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다시 찾아갔다. 그들은 나를 보자 왜 찾아왔는지 알겠다는 듯이 "오늘은 또 어느 창고로 출동할까요?" 하며 농담을 건넸다. 그들의 마음이 풀린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같이 차 한잔 하다 보니 그들이 마음이 왜 누그러졌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템 매니저들은 창고의 물건을 확인하다 전산에 제대로 입력되지 않은 부품들을 여러 개 찾았다고 했다. 창고 근무자들 역시 저장 위치를 헷갈려 잘못 놓은 물건을 제 위치로 옮기는 일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벗어나 현장에 나간 덕분에 자신들의 실수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아이템 매니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모니터 화면에서 클릭만 하던 수리부속을 실제로 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20년 가까이 일한 그분에게 항공기 부품이란 그저 계약서와 운송장, 그리고 시스템 속 재고번호 아홉 자리 수가 전부였던 것이다. 이렇게라도 실물을 한 번 본 게 어디냐며 웃는데, 나는 그 이야기에 따라 웃지 못했다. 오히려 속으로 뜨끔했다. 나 역시도 현장을 모르고 페이퍼로만 일을 진행하다 이 사달을 내지 않았던가.



비단 이번 일 뿐만이 아니었다. 일이 익숙해졌다는 핑계로 점차 현장과는 거리를 두고, 사무실을 책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물건의 흐름을 그저 화면 속 점과 선들의 연결로 생각했다. 누가 그랬던 것처럼 책상머리에 앉아 펜대를 굴려 나온 계획을 경계했어야 했다. 공장에서 생산된 부품이 우리에게 전달돼 창고에 보관되고, 사용자인 정비 작업장에 배달되는 모든 과정은 실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모니터 속의 숫자들이 늘고 줄어드는 그 순간에도 수리부속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도 현장보다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종종 주변의 동료들이 '한 사이클을 돌았다'는 이야기하는 걸 듣는다. 프로젝트를 하나 마무리했을 때, 매 분기 또는 연간 단위로 반복되는 일을 끝냈을 때 하는 이야기다. 그 말속에는 '한 번 경험해본 일이니 다음에 할 때는 수월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익숙하다 못해 소홀해지는 일을 조심하라고. 그리고 바쁘 더라도 일을 시작하기 전 한 번씩 현장을 다녀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부서장님의 손을 잡고 같이 창고에 나가 일주일씩 살다 오는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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