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란 무엇인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의 가능성과 그 의미에 대하여

by 황인석

실재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많다. 우리 눈 앞에 있는 대상들도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 마음 속의 생각이나 감정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재’라는 단어는 그것들 모두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함축한다.

존재하지만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먼저 신기루나 다른 착시 현상들이 떠오른다. 신기루는 진짜 있는 것 같지만 막상 가서 보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착시현상에는 다양한 사례가 있지만, 서로 길이가 같은데 다른 길이로 보이거나 색상이나 밝기가 달라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가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참으로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신기루나 착시 현상은 예외적인 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 눈 앞에 있고 만질 수 있는 대상들은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실재’라는 개념은 우리가 인식하는 너머에 참된 존재가 있고 우리는 그것에 비롯된 감각들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실재 그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빨간 색의 사과를 보고 있다고 하자. 우리는 사과가 참으로 존재하고 참으로 빨간 색이라고 생각하지만, 붉은 색을 식별 못하는 색맹은 다르게 볼 것이다. 강아지나 박쥐 같은 다른 동물들도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빨간 색을 감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존재란 알 수 없고, 우리의 인식의 상에 비친 모습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빨간 색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는 있지만 빨간 색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참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실재’와 그것을 인식에 반영한 ‘표상’을 구분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표상이 실재와 일치하지 않을 떄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기루가 진짜 오아시스인 줄 알고 갈증을 참아가며 걸어갔는데 정작 오아시스가 없으면 매우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빨간 색의 사과의 경우 색맹처럼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그 사과가 빨간 색이라는 데에 동의한다면 그 사과가 ‘실재’의 세계에서 빨간 색이든 아니든 별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궁극적인 실재인지 그것에 의한 반영에 불과한 것인지를 따지는 의미는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과 실재는 거의 항상 거리가 있게 마련이고,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어 중세의 사람들은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진다는 믿음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갖지 않았다. 돌이 깃털보다 빨리 떨어지는 건 일상의 경험과 부합하고 직관에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갈릴레이가 행한 피사의 실험은 그런 믿음에 반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후에 사람들은 낙하 속도가 무게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부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기존에 가졌던 믿음과 지식들은 확실성을 갖지 못하고 수정이 되어 간다.

다시 말해 실재에 대한 지식은 불완전하고, 우리가 확실하다고 여기던 지식조차 때로는 의심의 대상으로 바뀐다. 시간이 우주 공간 어디서나 항상 같은 속도로 흐른다는 것은 의심의 필요성도 없는 자명한 믿음이었지만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 수정되어야 했다. 질량이 없는 빛의 진로가 중력의 무게에 휘어진다는 것 역시 중력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사실로서 20세기에 들어서야 예측되고 발견되었다.

이처럼 우리가 실재에 대해 갖는 지식은 한정적이며, 우리가 확신을 갖는 믿음 역시 언젠가 잘못되거나 부정확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상당히 안정적이다. 우리는 여러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여 상당히 높은 확률로 여러 가지 예측을 할 수 있고, 우리가 설계한 여러 구조물이나 기계들도 그 목적에 맞게 잘 작동한다. 우리가 이렇게 예측이나 실천에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안정적인 법칙들은 실재를 반영한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완벽한 일치를 확인하려는 야심을 버린다면, 우리가 실재 그 자체를 알 수 있느냐는 의문을 두고 여러 논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실재가 있고 우리는 그 실재를 반영한 여러 경험들을 인식한다. 그 경험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게 일관성을 갖추어 주는 이론, 예측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예측이 높은 확률로 결과와 일치하는 모델이 있다면 충분하다. 그런 모델의 한 구석에는 어떤 경험들을 설명해 주지 못하는 모순들과 의문들이 남아 있을 것이나, 그런 것을 감수하고 모델을 활용하거나 남는 힘이 있다면 모델을 더 보완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실재의 문제는 그렇게 제쳐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세계에 속하지 않는 많은 존재들이 있다.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것들은 철학과 심리학, 뇌과학 등을 통해 탐구가 되어 왔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여러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서 실재로 영향력을 갖는 존재가 되는 사회적 실재들, 예를 들어 돈의 가치나, 권위, 제도, 법, 윤리 등의 대상들은 물리적 대상들보다 다루기가 훨씬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갖는 많은 사안들은 이와 같은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현실과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본질은 비슷하다. 우리는 실재 그 자체를 알 수 없지만, 실재에서 비롯되는 경험들을 인식하고, 예측하고, 조정하는 지식 모델들을 갖는다. 그 지식 모델은 선천적인 것에서 시작해 일상의 경험이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한 학습으로 확대되고 조정되며 사고 과정을 통해 반성과 보완 과정을 겪으며 통합되고 발전한다. 직관적 판단, 상식, 좌우명과 믿음들, 정보와 지식들로 구성된 방대한 모델이 우리를 판단과 예측과 실천으로 이끈다.

하지만 성숙한 산업의 엔지니어들이 물리적 세계를 다룰 때와 달리 우리의 지식과 모델은 형편 없는 수준에 머무른다. 우리는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 형편 없이 실재를 모델링하는 처지지만 우리의 인식과 직관이 실재 그 자체라고 믿는다.

그것은 아마 유용한 실천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모델을 통해 재구성한 세상을 진짜가 아니라고 믿으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에 전념할 수 있겠는가? 의심이란 대개의 경우 불필요한 자원만 소모시킬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실재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실재를 그 자체로서 알 수 없으면서 실재에 대한 모델을 구성하는 이유는 유용한 실천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우리가 진화의 과정에서 여러 감각기관과 뇌를 발전시켜 온 이유다. 뱀에 대한 공포나 더러운 것에 대한 혐오처럼 선천적 인식 모델 위에 여러 학문과 문화를 쌓아 올리면서 세상을 인식하는 모델이 발전하여 왔으나 그 모델은 완전함에서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고, 과학기술의 어떤 분야에선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 대다수의 영역에선 임기응변 수준에 불과하다.

앞의 글에서 필 로렌츠바이크의 주장을 다시 상기해 보면, 어떤 일을 할 때는 주관적 희망이나 믿음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고자 애쓰면서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는 ‘계획적 사고’와 모든 의심을 잊어버린 채 목적을 달성하는 데 몰두하는 ‘수단적 사고’가 함께 필요하다. 하지만 두 사고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모드를 오고 가야 한다. '계획적 사고' 모드에 따라 계획과 결심을 마치고 행동을 앞두고 있을 때는, 자신이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행동에만 몰입해야 한다.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현실은 의식에서 잊혀져야 한다.

실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도 그와 비슷한 모드 전환이 불가피해 보인다. 우리는 의심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들을 실재인 것처럼 여기는 착각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착각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식에 거리를 둘 수도 있다. 실재 그 자체인 듯이 여길 수도 있는 소수의 분명한 진실들을 확인하며, 그밖의 임시변통적인 가치만 갖거나 그조차의 가치도 없는 번잡한 인식들을 구분할 수도 있다.

불필요한 욕구와 목표들을 줄이고 가장 중요한 대상에만 집중하면서 가장 진실된 인식에만 의존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많은 활동과 목표들을 지향한다면, 불가피하게 그만큼 불완전하더라도 광범위한 모델들을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모델들이 산출하는 인식들이 실재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식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불필요한 많은 인식들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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