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최대화한다는 생각의 문제점
제목의 의미를 더 설명해 보자면, 이 질문은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또는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아니다. 선택을 위한 고민, 더 넓게는 더 잘 살기 위한 고민을 얼마나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전 글들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었지만 이번 글을 통해 더 명확하게 따져 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의 전제는 무신론 내지는 불가지론이다. 즉, 신이나 다른 초월적 존재에 의해 외부로부터 인생의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정답 같은 인생의 목표나 의미가 없다면,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찾아야 살아야 할까.
만약 목표와 의미가 없다고 하면, 더 잘 살기 위한 고민도 필요 없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열심히 고민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삶의 의미와 목표를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여기에는 여러 답변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좋고 나쁨에 대한 자연스러운 판단이 있고, 좋은 것을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나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때는 분명한 진실처럼 느껴진다. 이 좋은 것들을 놓아두고 권태나 우울이나 슬픔이나 고통 등 나쁜 것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 본성에 맞지 않는 일처럼 느껴진다. 물론, 궁극적인 초월적 의미가 없다면 좋은 것 대신 나쁜 것을 선택해도 된다. 그러나 왜 굳이 그래야 할까?
이 ‘좋은 것’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해 보자. 만약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충분해서 자신이 선택 가능한 대안들 중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대안을 명확히 알 수 있다면, 선택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물론, 충동이나 불합리한 감정 등으로 인해 이성적으로 불행을 가져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경우는 이성적 판단이 100%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직관이나 감정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 판단의 영향을 받는 때가 많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문제는 이성을 따르지 않는 성향에 있는 것이지 행복을 최대화하는 선택이 좋은 선택이라고 하는 명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마시멜로 실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즉, 지금 마시멜로를 먹으면 한 개 밖에 먹지 못하지만 30분 정도 참으면 두 개를 먹을 수 있는 상황이다. 행복 최대화의 기준에 따르면 30분 후 두 개를 먹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만족, 다시 말해 ‘좋은 느낌’을 최대화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다.
이와 같은 행복 최대화의 기준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면서 살기는 어렵다. 겨울이 대비하지 않으면서 여름을 살 수는 없다. 미래를 위해 현재에 대비를 하고,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인내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행복은커녕 생존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행복 최대화의 기준으로 선택을 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옳은 선택에 필요한 지식과 판단력이 부족하다거나, 선택에 들어가는 시간과 마음의 고통과 같은 비용이 선택의 질이 나아짐으로써 얻는 효과보다 클 수 있다는 등의 어려움은 현실적으로 거의 극복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 타협책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극복이 불가능한 문제는, 좋음과 나쁨을 평가하고 행복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행복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다면 최대화도 불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기쁨을 느끼는 경우엔 그 경험이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다 낫다고 확신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예외적이며, 그런 예외적인 경우조차도 비판적으로 살피면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만약 그 사랑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삶은 이어졌을 것이고 그 속에서 다른 경험들을 하게 되었을 것인데, 후자가 전자보다 더 나빴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의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 경험이 좋고 다른 가치와 바꿀 수 없다고 하겠지만, 그 경험을 아직 하기 전에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반드시 거기 동의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마시멜로의 상황을 다시 가져 오자면, 30분 동안 인내를 하고 마시멜로를 두 개 먹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일까? 마시멜로 두 개가 한 개보다 절대적으로 많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착각이 아닐까? 마시멜로 하나를 더 먹겠다고 30분 동안 욕구를 참아내면서 마음 속에 마시멜로를 두는 것보다 지금 바로 먹어버리고 마시멜로에 대한 생각을 아예 잊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어쨌든 마시멜로 하나 더 먹는다고 한들 결국엔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의 삶과 다른 경험들로 이루어진 다른 삶의 가치를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 이런 삶은 살아보고 싶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관적 판단일 뿐 절대적으로 옳은 정답은 아니다.
한순간의 지극한 행복이 평생에 걸친 슬픔과 불행의 대가로서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우리가 기쁨이나 슬픔, 좋음과 나쁨 등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긴 하지만 경험과 감정의 세밀한 구성은 다 다르기 때문에 양적인 척도로 비교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경험이란 경험하는 그 순간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일 뿐 그 순간이 아닐 때에는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부정확하게 재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동시에 할 수 없는 두 가지 경험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우리가 충분한 지식과 지혜를 갖추었다면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선호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으로 올바른 선택과 그렇지 않은 선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더군다나 우리가 좋은 선택을 위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선택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와 지혜가 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고민을 통해 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가 한층 더 부족해진다.
물론,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고민을 해야 하는 때는 있다. 고민의 과정에서 부족한 정보와 지식을 더 모을 수도 있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면서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으며, 부족한 용기와 결단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할 수도 있다. 이런 노력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선택에 신중하게 임하는 것은 행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집착과 강박을 벗어난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어떤 욕구나 목표, 대상을 향해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모든 것을 뭉뚱그린 행복과 같은 모호한 실체를 최대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내려 놓는 것이 낫다.
인간의 마음은 구체적인 것을 잘 다루도록 구성되어 있고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다룰 때 혼란에 빠지기 쉽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제대로 규정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것을 최대화한다는 것은 좋은 지향이 아니다.
벤담 식의 공리주의는 사회 정책에 합의 기준으로 쓰일 수는 있어도 개인의 삶에서 선택을 내리는 기준으로는 부적합하다. 공리주의적 기준이 마음에 내재화되어 있는 사람은 인생을 구성하는 경험들을 서로 대체 가능한 양적 비교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마음의 한편에서는 항상 비교와 계산에 자원을 쓰고 그에 따른 불확실성에 고통 받으며 어떤 대상에도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다. 대상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죄책감을 느끼고, 최대화된 이익 같은 하찮은 가치를 추구하는 자신에 대해 낮은 자존감을 갖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을 거라는 의심은 감사와 만족을 불가능하게 하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은 자유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행복을 최대화한다는 생각은 마음에서 지우는 것이 낫다. 그 생각이 마음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행복해지기가 더 어려워진다. 우리가 삶에서 지향해야 할 것은 추상적인 행복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나 자신에게 더 생생한 의미로 와 닿는 대상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들은 더 높은 차원의 가치의 기준에서 대체 가능한 수단들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 있는 대상들로서 존중을 받아야 할 것이다.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고민을 안 하면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고민이 삶에 주는 부담은 가급적 줄여야 한다. 행복처럼 추상적이고 혼란스러운 개념을 기준으로 삼으면 상시적인 불안과 고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대신 우리는 사랑과 자유와 지식과 같은 가치들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원하게 만들고 설레게 만드는 대상들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기여도를 따지지 않고 그 대상들을 대한 내 마음에 충실할 수 있다.
자유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고민으로 쥐어짜낸 것이 아닌 가볍고 경쾌한 논리들과 직관에 의존해 걸림이 적은 삶을 살 수 있다.
살아가면서 좋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우리의 지식이 자라날 것을 기대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기대는 당면한 선택에 모든 것을 걸듯이 집착하지 않게 해 준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시도하고 배워갈 수 있다.
이처럼 행복의 최대화라는 기준을 벗어나 가장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의 나에 어울리는 선택들을 해 나간다면, 지나친 고민에 삶을 손상당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변화와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