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과 질투에 대하여

그 유용함과 무용함

by 황인석

먼저 부러움과 질투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두 감정이 비슷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중요한 점에서 다른 것인지에 대해 살펴 보겠다.

인터넷을 찾아 보면, 질투는 가진 것을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 부러움은 갖지 못한 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으로 서로 구분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이 구분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모짜르트에 대한 살리에르의 어두운 감정은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에 대한 부러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냥 부러움이라고 부르면 뭔가 부족한 듯하다. 부러움은 상대적으로 좀 순한 감정처럼 여겨지는 반면, 질투는 더 어둡고 격정적인 느낌이 든다. 살리에르가 단지 부러움 뿐 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위협받는 것으로 느꼈을 거라는 것이 질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이는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위협의 존재 여부와 별개로 다른 누군가를 넘어서려고 하는 강한 경쟁의식에서 비롯되는 격한 감정들은 부러움보다 질투라는 단어가 어울려 보인다.

다른 예로, 짝사랑을 하는 상대가 다른 이성과 즐겁게 어울리는 모습을 볼 때의 고통스러운 감정 역시 짝사랑 상대이니 자신이 소유한 대상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부러움보다는 질투에 가까운 것 같다. 아니면 부러움과 질투, 두 가지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두 감정에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일상에서 명확한 경계가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남이 갖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란 의미로 부러움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로 하겠다. 하지만 명확한 의미 구분을 하지 않고 뉘앙스가 더 적절하다고 여겨질 때는 질투라는 단어도 섞어서 사용하도록 하겠다.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상당한 괴로움을 안겨주고 일상의 평화를 방해하는 감정이다.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다루는 방법이 필요한 것은 이런 부정적 측면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부러움에도 긍정적 측면의 역할이 있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 감정은 생존과 번식에 유용한 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부러움과 질투는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알게 해 준다. 또는 평온하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어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찾도록 만드는 역할도 한다. 질투는 경쟁적 상황에서 경쟁자에게 밀리지 않고 자기 몫을 주장하게 만드는 역할도 할 것이지만, 부러움은 경쟁자에 대한 공격적 행동보다는 욕구를 자극하고 더 분발하게 만드는 쪽으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부러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태평하게 만족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부러움이 많은 사람은 항상 기회를 살피고 더 많은 것을 얻고자 노력한다. 아마 부러움과 질투가 강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은 성취를 이룰 가능성이 있다.

앞의 글에서 소개한 적이 있지만, 버트란드 러셀은 부러움과 질투의 감정이 불합리하다는 근거로서 그 대상에 한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영광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나폴레옹을 부러워하겠지만,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부러워하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부러워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심지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아킬레우스를 부러워할 것이라는 것이다. 부자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워렌 버핏과 같은 억만장자에 비한다면 웬만한 부자라고 하더라도 초라한 재산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러움의 감정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채워질 수 없는 불합리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논리가 부러움의 감정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왔었지만, 요즘에는 좀 회의적이다. 부러움이라는 감정의 유용성이 자신의 욕구를 발견하고 더 분발하기 위한 노력을 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고 하면, 워렌 버핏 같이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마도 연예인의 화려한 생활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 부러움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을 텐데, 연예인은 보통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 등 가까이 있는 사람들, 자기와 비슷한 기회를 가졌지만 그 기회를 자기보다 더 잘 살려 좋은 위치에 오른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가장 고통스럽다.

결론적으로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불합리하다거나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반대 측면을 살펴 봐야 할 때다. 당연한 말이지만 부러움이란 감정은 많은 비용과 손실을 초래한다. 우선, 그 감정 자체가 고통스럽다. 질투로 인해 마음이 타들어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부러움은 우리 마음을 괴롭히고 주위를 산만하게 만든다.

아마 부러움의 가장 나쁜 부작용 중 하나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가치를 폄하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부러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직장, 일, 가족, 친구, 연인, 생활 전반,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불만은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감수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의심하게 만들고 집중을 방해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가족과 휴가를 떠날 일에 들떠 있던 사람은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직장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의욕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부러움의 대상이 명확하다면 오히려 낫지만,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은 부러워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음을 산만하게 만든다.

이런 여러 부작용들의 직간접적 효과는 막대한 것일 수 있다. 지나가는 감정으로 잠시 느끼는 부러움은 좀 낫겠지만 부러움이 깊은 사람은 생활 전반이 부러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사람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과 자기 자신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부러움을 느끼는 빈도가 잦고 정도가 심한 사람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에 관심을 두면서 살게 된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부러움이라는 감정에는 긍정적인 효용과 부정적인 비용이 함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수준의 부러움을 갖는 것이 답일까? 효용과 비용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쟁이 심한 환경 속에서 성취 동기가 높은 사람은 경쟁자들의 동향을 수시로 살피고 질투와 부러움에 자극을 받아 자기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부과하며 더 나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일류급 스포츠선수나 학자나 CEO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 직업에 관련해서는 질투심이 강하나 가족이나 그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객관적인 지표가 있는 분야, 그 지표를 기준으로 할 때 더 높은 수준을 달성하는 일이 노력으로 가능한 분야에선 부러움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직업적 성취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부러움은 긍정적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고통이 되기보다는 의욕으로 전환되기가 쉽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범위가 너무 넓거나 막연한 부러움, 부러워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지가 명확하지 않은 부러움이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 자신이 가진 것들과 비교할 때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은 대상에 대한 동경, 자기 자신보다 훌륭해 보이는 이들에 대한 질투, 자기 자신과 주변에 있는 것들이 초라해 보이는 느낌 같은 감정들이다. 이런 감정들은 별반 도움은 되지 못하는 반면 마음을 혼탁하게 만들고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심한 경우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한다. 독감에 걸린 환자가 입맛을 잃듯, 부러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기보다는, 단호하게 경계를 짓는 것이 필요하다.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적절함이 어떤 정도인지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몹시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부러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런 감정이 우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 그 감정을 잃을 때 함께 잃게 되는 다른 것들이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런 미련과 집착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종류의 부러움은 분발하기 위한 의욕으로 전환시키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마음만 갉아먹는 종류의 부러움은 단호하게 떨쳐야 한다.


부러움은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우리 마음의 메커니즘인 것이지 객관적인 근거를 가진 필연적인 반응이 아니다. 어떤 경험을 하면서 감정이 일어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그 감정은 경험을 해석하는 인식의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우리 어깨를 밀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일어난 분노는 그 사람에게 고의가 없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가라앉는다. 부러움과 같은 감정도 우리가 어떤 인식을 하느냐에 따라 그 방향이 달라진다.

부러움은 우리가 더 노력하면 더 나은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정보로서 의미가 있을 뿐, 그밖에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신체적으로 겪는 고통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슬픔은 그 원인에 따른 필연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왜 자기 자신에게 고통이 되어야 하는가? 비교에 의한 고통은 실제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서, 또는 관심과 주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잊어버릴 수 있는 고통이다.

어떤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다른 고통은 인식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다. 어떤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고통은 실제의 고통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목마름 역시 실제의 고통이 아니라 물을 마시는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우리 마음의 메커니즘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목마름은 적절한 행동으로 우리를 유도하고 그 행동의 결과로 갈증의 해소 같은 뚜렷한 보상을 얻는 반면, 막연한 부러움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또한, 삶에는 궁극적인 의미가 없고, 모든 인간은 같은 결과, 즉 죽음에 이른다. 삶은 과정이고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일 뿐이다. 자기 방식대로 그 과제를 수행해 나가고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것들을 누리면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 어떤 것을 누리고 누리지 못했는지는 궁극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누릴 수 있는 경험들은 다 다른 것일 뿐 절대적인 의미에서 좋음과 나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경험들로 가득 차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복한 삶과 고통 속에 간혹 찾아오는 위안만 누리면서 사는 삶 사이에 궁극적인 가치의 차이가 있을까? 어떤 삶이든 그 결과는 동일하고, 내세에서 우리 삶을 평가하고 성적을 매기는 존재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존재한다고 한들 우리는 그 평가의 기준을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우리보다 나은 사람의 삶이든 어려운 사람의 삶이든, 그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생활을 경험했다고 해도 그 경험이 지난 후에는 부정확한 기억만 남고, 경험을 하는 주체의 변화에 따라 경험의 성격도 바뀌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들을 비교하지 못한다. 우리의 비교는 부정확한 어리짐작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나친 책임감을 내려 놓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집중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몫은 남들과 비교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진 전부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 들어와 있는 대상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 어떤 대상들을 접하느냐보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거나 곁에 두는 대상들에 어떤 태도를 갖는지가 우리 삶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부러워하는 대상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지나친 의무감을 내려 놓고, 자기 몫의 삶에서 만나는 대상들에 충실하겠다는 결심을 할 필요가 있다. 부러움에서 마음을 돌리는 일은 포도를 따 먹으려다가 실패하고 돌아서면서 포도가 시어서 그럴 거라고 핑계대는 여우의 자기 위안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깊은 욕구를 방해하는 고지식한 집착을 떨쳐내는 일이다.

꿈꾸고, 동경하고, 분발하고, 용기를 내고, 힘든 선택을 하고, 노력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삶을 더 빈약하게 만드는 부러움에 꼭 의존할 필요는 없다. 자기 삶에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 역시 자기 삶에 한 부분으로 들어오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고지식한 집착을 버리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 충분히 풍부하고 신비롭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단호하게 믿는 것이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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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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