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기
'통 속의 뇌' 가설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힐러리 퍼트넘이라고 하는 철학자가 1981년 즈음 제시한 철학적 가설인데, 우리 뇌가 인지하는 세상이 실제의 세상이 아니라 뇌에 연결된 컴퓨터로 입력 받는 전기 신호에 의한 가상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뇌는 스스로 인지하는 자기 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양액이 채워진 통 안에 들어 있는 상황입니다.
퍼트넘이 가설을 제시한 건 이 명제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모순임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저한테는 그 논증이 잘 와닿지 않았고 여러 반박들도 존재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통 속의 뇌'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그다지 신선한 상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설정과도 비슷하고, 퓨처 선장이라는 옛날 애니메이션에도 뇌와 분리되어 배양액에 담겨 살아 가는 사이먼 라이트 교수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리 세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가상 시뮬레이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웹툰 같은 곳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상이지요.
그런데 제가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통 속의 뇌' 가설이 참일 수도 있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관점에서 보면 우리 뇌는 이미 통 속의 뇌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뇌는 두개골이라고 하는 통 속에 갇힌 채로 전기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세포들을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우리 뇌는 상당히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셈입니다. 단단한 두개골 안의 컴컴한 장소에 갇힌 채 외부와는 전기가 흐르는 신경 다발로만 연결되어 있을 뿐입니다. (물론, 혈관도 있긴 합니다만..)
뇌가 받아들이는 전기신호들이 어떤 외계인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호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요지는, 뇌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뇌는 색상을 보거나 냄새를 맡거나 촉각을 느낄 수 없습니다. 뇌에는 고통을 느끼는 세포가 없어서 바늘로 찔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식이 있는 채로 뇌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뇌는 오로지 눈과 코, 혀와 근육, 내부 장기가 보내 오는 다양한 전기신호를 받을 뿐입니다.
자신이 뇌의 처지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을 하는 것이 뇌인데 뇌의 처지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취지를 이해해서 상상에 동참해 주셨으면 합니다. 통 안에 갇힌 채로 쉴새 없이 밀려드는 전기 신호들을 갖고 끊임 없이 온갖 판단들을 내려야 하는 처지이죠. 이 전기 신호를 갖고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을 어떻게 할지 알기 위해서는 그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뇌라고 하는 기관이 가진 역할은 무엇일까요?
뇌는 다른 신체기관들과 마찬가지로 개체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봉사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통 속의 뇌가 할 일은 자신이 담겨 있는 큰 통이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남고 짝을 만나 자손을 만들게 하는 일입니다. 다만 다른 신체기관들이 하는 일은 소화나 호흡 같이 비교적 한정된 역할을 위한 것인 반면에 뇌는 개체를 대표해서 의사결정을 내리고 각 기관들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전기신호가 들어오면 뇌는 이 신호들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얽힌 전기 회로에 흘려 보냅니다. 그 회로의 일부는 신체의 다른 기관들과 연결되어 있어 여러 지시사항들을 전기신호의 형태로 내보내죠. 그러는 동안에도 신체의 각 기관들은 새로운 신호들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회로 중의 일부 구역에는 계기판처럼 신체의 다양한 신호들이 종합되어 일종의 좋음과 나쁨의 정도를 평가하는 회로들이 존재합니다. 뇌는 이런 회로의 변화를 참조하여 단기적인 전기흐름을 조정하는 동시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회로의 구조 역시 조정합니다.
어설픈 비유입니다. 뇌가 전기흐름을 조정하고 배선을 조정한다고 했는데, 뇌가 회로 그 자체이고 그 위를 전기 신호가 흐르는 것이 바로 뇌가 활동하는 방식입니다. 뇌를 어떤 기계장치를 다루는 사람처럼 비유를 하다 보니 기계 장치 내부의 구조와 사람의 작업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비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비유가 재미있기도 하고, 유용한 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들어 보자면, 이 비유는 뇌가 하는 일의 엄청난 어려움을 실감나게 느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은 1000억개의 뇌세포입니다. 이 뇌세포들을 연결(뇌세포 하나 당 평균 1000개 정도의 연결)해서 디지털 형식으로 들어오는 전기신호들을 해독해 세계의 현실에 근접한 쓸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 이미지에 기반해 추론, 판단, 운동 등 온갖 결정들을 내려 적절한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며, 필요한 정보들을 저장하고, 새로운 지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은 뇌라는 기관에 대한 경이감을 품게 하는 한편으로, 우리 인간이 숱한 인지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여러 오류들을 찾아내 비판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의 넓이와 다양성과 복잡함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그런 세상을 500ml 우유곽 두 개보다 조금 큰 부피를 가진 뇌 안에 재현하고 다룬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며, 이나마 해 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뇌들을 칭찬해 주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