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이어져 가는 것은 삶의 순간들이며 과거 속에 떠올리는 기억들은 스쳐지나가는 장면들로 펼쳐지는 페이지다. 밤과 낮을 이어살고 사계절을 이어살고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을 이어 산다. 눈을 뜨면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꿈을 꾸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이유도 모른 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실타래처럼 짜여놓은 선 안에서 매일을 보냈다. 그런 환경에서 벗어날 줄도 모르고 도망치는 생각조차 못했고 탈출을 시도하는 방법도 몰랐다. 묶여진 삶에 몸서리를 치기도 하였지만 그땐 주어진 모든 것에 굴복하고 받아들이고 괴로워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땐 그는 연약한 아이였고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쌓아가는 의문을 이어가면서 하루를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고통스럽고 힘든 어린 시절의 꿈은 하루빨리 커서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유를 찾아 저 산 너머 멀리 날고 날아 이 자그마한 시골을 벗어나겠다고 생각하는 것만이라도 그때의 조그마한 아이한테는 위로가 되었을 게다.
보슬보슬 봄비를 촉촉하게 맞으며 어린 아이는 산 너머 고개를 바라보면서 하루 빨리 크고 싶다고, 하루 빨리 어른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아이는 그렇게 꿈과 같은 현실, 현실과 같은 꿈을 넘나들면서 환경과 틀 속에 갇혀 힘들게 자라났다. 그 후 갈수록 외롭고 견디기 어려운 삶의 무게들이 아이의 조그마한 마음과 생각을 조금씩 짓눌러 놓았다. 하지만 삶은 크게 달라지거나 바뀌지 않았으며 거의 그대로일 터였다.
어느 날, 현실과 같은 꿈에 빠져들면서 아이는 흐리터분한 안개 속에 갈 길을 잃은 채 슬프게 혼자 서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없는 텅 빈 초가집의 형체가 눈앞에 어렴풋이 나타났다. 한 때는 가족들과의 따뜻함과 행복함이 묻어나는 곳이긴 하였지만 지금은 어둡고 스산한 기운이 가득 찬 소름 돋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이는 조그마한 언덕에 올라서서 주위를 살펴본다. 마을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으스스한 차가운 기운들에 둘러싸인 아이는 그 곳을 벗어나려고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해 보았지만 매번 실패로 눈을 번쩍 뜨곤 한다.
어느 덧, 세월이 지나서 현실이 바뀌고 상황이 변하였다. 몸이 비록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가엾고 초라한 아이는 어둠 속에 갇혀 춥고, 고프고, 외롭고, 아프다. 뇌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세월은 아픈 상처들을 묻어두지만 마음속의 얼룩진 흔적들을 전부 다 씻겨버리지는 못했다. 과거의 뿌리들이 자라서 오늘의 삶이 만들어진다.
맨 처음에 엄마의 자궁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딸이라는 이유로 병실 한구석에 외면을 당한 채 그 울음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뚫으며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목에 핏줄을 세워 서럽게 내 뱉었다고 한다.
오늘 날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만 아물지 않는 상처와 아픈 가시들이 꿈속에 나타나 악마처럼 괴롭히기도 하고 따라다니기도 한다. 할 수없이 굳게 닫힌 과거 속 어둠의 문들 두드리면서 기억의 조각들을 긁어서 끌어 모았다. 그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치유가 되지 못한다면 마음한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어린아이와 그를 괴롭히는 악마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고 마음속 아이는 늘 슬프고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지금 흐르는 세월과 함께 몸은 성장하고 조금씩 늙어가지만 나약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어린 영혼은 낡은 기억들에 파묻혀 크지도 자라지도 못하였다. 지금은 그 아이를 어둠속으로부터 하루빨리 구원해내는 것이 최선이고 다친 아이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치유해주는 것이 우선이고 시급하였다.
때문에 덩치가 큰 어른이 된 아이는 마음한구석에 숨어있는 자신의 어릴 때 모습의 어린 아이와 자신이 낳은 또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서로 어울리게 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반반 나누어 먹기도 하고 그림그리기와 공놀이 혹은 동화책을 함께 읽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상처투성이인 어린 영혼은 때론 가슴에서 튀어나와 두 아이와 함께 어울리는 순간을 너무나 즐거워하였고 행복해하였다. 그 순간만큼은 엄마라는 껍데기를 벗고 아이들의 친한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렇게 서로 보듬어가고 위로해주면서 함께 자라나기도 하였다.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면 마음속 아이의 상처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속에서 마구 튀어나와 상대방과 적이 될 수도 있고 결핍된 마음과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염 시킬 수 있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마음한구석에 숨겨진 상처받은 외로운 아이를 잘 치유하고 보살피기 위해, 어른이 된 나는 오랜 세월 속에 파묻혀 버린 마음속의 낡은 상자 속에 갇혀있는 기억들을 마구 휘저어보았다. 그 상자안의 인스턴트의 삶과 이야기들을 조금 더 또렷하게 들여다 보기위해 그 위에 쌓여진 먼지를 훌훌 털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뚜껑을 살며시 열어젖히면서 너덜너덜해진 과거를 조심스럽게 하나씩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