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 집을 떠난 아이

by 조수란

그날 밤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커다란 괴물에게 쫓겨 다니면서 허겁지겁 도망을 다녔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는 만화영화 서유기에서 나오는 손오공으로 변신해보기도 하고 하늘 높이 날아보기도 하면서 무섭고 괴로운 긴 밤잠을 보냈다. 이튿날, 햇빛이 온 몸에 달아오를 때에서야 뜨거워진 몸을 힘들게 가누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지난밤 악몽에 시달리며 피곤에 지쳐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갑자기 눈앞으로 스쳐지나가는 불길한 생각에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 제자리에 앉아 눈을 깜빡였다. 예상한대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텅 빈 집안에 나를 혼자만을 남겨두고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부부는 늘 그래왔다. 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어제 저녁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부부는 분명 수레에 가득 실은 과일과 채소를 광주리에 담고 오늘 아침 시내에 장보러 간다고 하였다. 시장구경 한 번 제대로 해보고 싶었던 나는 제발 꼭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처음에 어른들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지만 끈질긴 칭얼거림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락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뭔가? 아무도 없는 집안 곳곳에서 파리들이 공중을 윙-윙-날아다니며 비행을 즐겼다. 그 소리들이 조용한 집안의 공기를 가로질러 시끄럽게 만들었다. 겁 없는 파리들은 나의 머리와 손과 발가락사이에 앉아 간질였다. 나는 한손으로는 파리를 쫓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 안에 고이기 시작하는 눈물을 닦아냈다. 갑자기 서러움과 배신감이 몰려와 마구 괴롭혔다. 그러자 마음속 밑바닥으로부터 실망과 증오가 겹쳐지면서 갈 길을 잃은 시선이 낡은 신발장을 향해 멈춰져 있었다.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여 진 고무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순간 무언가에 결심한 듯 파란고무신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되는 대로 신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길을 따라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항상 스스로 신발을 잘 신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가던 마을 어르신들은 자꾸만 반대로 신었다고 말했다. 참 알 수없는 일이다.


아침이슬은 여전히 방울방울 풀잎에 맺히고 밝은 태양은 내가 가는 방향을 따라 환하게 웃으면서 따라온다. 초록색으로 물든 무성한 숲은 신성함을 뽐내며 온 산을 아름답게 그려놓았다. 언덕 위를 넘어서 한참을 걸으니 이마위로 땀이 송골송골 미끄럼타고 내려왔다. 한참을 지나 왔던 길을 뒤돌아보니 어느새 저 멀리의 집들은 눈앞에서 멀어져 갔고 조금만 더 지나가자 마을전체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순간 어디선가 으스스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방금 전까지 환하게 웃던 태양도 구름 뒤에 모습을 감추었고 알 수없는 스산한 바람이 귀를 스쳐지나 풀숲을 바스락거리며 불어댔다. 나는 섣불리 집을 떠난 자신의 어떤 행동에 후회스러움이 묻어났고 짧고 얕은 한 숨을 길게 내 쉬었다.


낮은 소리로 “엄마, 엄마.”하고 애처롭게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건 두려움에 담긴 작은 목소리뿐 이였다. 앞으로 더 나아갈까 아니면 집으로 되돌아갈까 망설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는데 깜짝 놀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심장이 하마터면 밖으로 튕겨 나올 뻔했다. 왜냐하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비닐로 몸 전체를 꽁꽁 감싼, 비옷을 입은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맑은 날씨인데도 온 몸은 비닐로 포장되었다.


너무 놀란 나는 비명을 삼키고 숨을 죽이면서 두 손 모아 입을 꽁꽁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용기 내어 조심스럽게 그 장면을 다시 뒤돌아보았다. 남자는 비록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서있긴 하였지만 커다란 몸집이 당장 달려와 납치할 것 같은 오싹함에 숨 쉬기 조차 힘들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멀리서부터 부릅뜬 남자와의 시선과 부딪치고 말았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고 공포에 휩쓸려 너무 무서워서 온 몸이 오그라들었다.


내가 그때 비록 아이에 불과하지만 이 상황에 비명을 지르거나 울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렇다고 갑자기 부딪친 두려움과 문제의 해결에 나서지도, 시도해보지도 않고 굴복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도망을 가면 더욱 안 되었고 앞으로 달리면 덩치 큰 남자가 금방 쫓아와 붙잡을 것 같았다. 순간 저 멀리 날수 있는 날개 달린 새들이 부러웠고 하늘 높이 자유롭게 둥둥 떠다니는 하얀 구름이 되고 싶었다.


이 상황이 견디기 어려울수록, 숨쉬기조차 힘들어질수록, 어지러울 정도로 공포가 밀려와 두려워질수록 차분하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달랬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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