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작은 아이가 신발을 벗자마자 가방 안에서 오늘저녁 맥스웰에게 써야할 희망 편지를 나한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해야 할 숙제가 많으니 몹시 바쁠 것 같다고 하였다. 그 말인즉 오늘만은 자기를 방해하지 말라는, 암시였고 미리 놓는 예방주사 같은 거였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체하고는 저녁 준비에 나섰다. 아이가 가방 안에서 꺼낸 물병이며 학교에서 친구가 만들어 주었다는 바구니종이접기며 공책과 필기구들이 바닥에 마구 널려있었다. 그리고는 집에 오자마자 깜빡 잊고 하지 않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듯 코로나시국에 손부터 씻어야 한다면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손바닥에 ‘아이 깨끗해’ 비누칠을 하고는 학교에서 배워준 그대로 깍지 끼고 사이사이 문질렀다.
손을 씻는 동안 그 순서를 노래로 부르고 율동하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었다. 작은 아이는 그렇게 오랫동안 씻고 나서 내려오는 물에 30초 이상 헹구고 난 다음 세수 비누 거품을 듬뿍 짜서 다시 얼굴에 바르고 쓱싹쓱싹 비볐다. 그리고는 푸~푸~ 하며 얼굴을 헹구고 나서야 세균들과의 한바탕 소동에서 막을 내렸다. 화장실을 나오면서
“아, 살 것 같다. 개운하다.” 라는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한마디의 말이 꼭 마치 조그마한 꼬마어른 같았다.
몇 년 전에 바쁜 일상에 치여 살면서 돌지나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작은 아이를 어쩔 수 없이 친정엄마가 키워주시기로 하였다. 그 후, 아이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행동과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하였다. 언젠가부터 식탁에 앉으면 TV 리모컨부터 찾아 만화영화를 보면서 밥을 먹기도 하였다.
TV를 켜면 광고에 나오는 말들을 철자하나 틀림없이 능수능란하게 따라하였고 저녁 아홉시 뉴스에 나오는 노래를 그대로 복사하듯이 따라 불렀다. 그야말로 이 세상 모든 것이 아이에겐 놀이였고 배움터였고 신비한 세계였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이 가장 많이 보고 듣고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그릇에 담으면서 열려있는 마음으로 온 세상을 받아들이는 듯싶다.
갈아입을 옷을 찾아 왔을 때, 아이의 양쪽 옷소매와 옷 앞부분에는 물에 흠뻑 젖어 축축해져 있었고 화장실 안에 머물렀던 자리에는 온통 물판이 되어 있었다. 도처에 튕긴 물방울이 여기저기에서 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와 한바탕 물과 씨름한 흔적들을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조금씩 커가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만약에 이 아이가 어릴 때의 나였더라면 엄마한테 많이 혼났을 텐데 그와 반대로 내가 낳은 조그마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인생에 끼어드는 순간부터 나는 내 아이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물단지인 두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 찾아온 기적이고 사랑이고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때로는 아이들이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 준비를 끝마치고 자기 방에서 독서하고 공부한 흔적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책상 위의 고무지우개와 찌꺼기들을 청소하고 정리하면서 문뜩 아이의 모습이 그리워지고 감동과 감사와 미안 함들이 저 멀리 마음밑바닥에서부터 파도처럼 출렁이곤 한다.
마흔에 들어서면서부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감성도 덩달아 깊어지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혹시나 아이들이 두고 간 공책이나 필통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잠시 망설였다가 다시 주저앉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부모님들이 되도록 학교접근을 자제해 달라는 가정통신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갑자기 침실로부터 책상에 마주 앉아 공부하던 아이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맥스웰한테 쓰는 희망편지가 생각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이는 맥스웰에게 쓰는 희망편지가 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쓰자니 엄마한테 쓰는 편지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다. 어쩌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모르는 낯선 친구한테 편지한통을 쓴다는 것은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맥스웰에 대해 떠오르는 질문을 많이 쏟아냈다. 그러자 아이는 맥스웰에 대해 몇 번이나 소개를 해주었는데도 기억은 그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할 수없이 인터넷에 들어가 맥스웰에 관한 동영상을 통해 그 아이의 삶을,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영상을 끝까지 보는 동안 맥스웰의 삶과 내 삶이 겹쳐지는 순간을 느끼면서 알 수 없는 서러움과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그 아이의 모습이 내가 어릴 때 자라난 환경이랑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2시간 넘게 몇 고개의 산을 넘어 아침저녁을, 사계절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교에 걸어 다녔던 일이며, 방학이 되면 밭에 가서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던 일이며, 입쌀이 떨어져 좁쌀을 먹거나 옥수국수를 먹던 일이며, 오래 된 낡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바쁘게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이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쩌면 그때 나도 외할머니랑 살다가 다시 부모님들이랑 잠깐 살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세월을 지나 기억의 일부가 많은 부분이 손상되고 생각의 필름에서 삭제되거나 지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간 삶의 흔적과 슬픈 기억들이 비슷한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잠재웠던 의식들이 다시 깨어나 수면위로 마구 떠오를 때도 있다. 내 안의 기억세포들이 혈관 속을 뚫고 들어와 심장을 떨리게 만든다. 그리움이라고 해야 할지, 서러움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도 내가 헷갈린다. 다만 그 아이의 사연이 마음 아팠고 한 편으로 우리 아이가 쓴 편지가 잘 전달되어 맥스웰의 꿈과 희망의 씨앗이 잘 자라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뭔지 모를 내 마음 속의 나약하고 외로운 아이에게도 따뜻한 포옹을 보낸다. 덩치만 자라고 마음은 그대로인 마음 한구석의 어린 아이가 오늘 만큼은 엄마라는 껍질을 벗고 내가 낳은 아이와 함께 한통의 편지를 통하여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와 감사를 보내본다.
오늘 우리가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털어놓게 되면서 작은 딸 아이는 그 중에서 자기가 제일 행복하며 동시에 맥스웰이 제일 불쌍하여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어쨌든 나의 가슴 아팠던 옛 시절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현재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맥스웰은 부모가 없고 지금도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제일 불쌍하다고 한다. 나와 아이는 맥스웰에게 꿈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적극 지지해주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풍요로움 속에 둘러싸여 빈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명의와 이익에 집중하면서 마음속에 계산기를 달고 사는 사람들, 자유로움 속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 매일 바쁘고 불안하게 하루를 사는 사람들,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혼자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고 오늘도 흔들리는 외부에 자신을 맡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내 아이와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배움과 나눔과 희망이 어디에 있으랴. 학교의 성적보다, 교과서의 지식보다 더 중요한 배움이 있다. 그건 바로 나누면서 행복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주어진 감사함을 배우는 삶의 희망이, 어쩌면 현명한 삶을 살아가는 기술이자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도 경험하고 주는 방법도 알아야, 마치 기계가 녹슬지 않고 더 잘 돌아가는 것처럼, 아낌없이 주고 닦을 때 더 윤기 나고 아름답다. 물이 고이면 고기가 죽고 썩듯이, 고인 물을 퍼내고 흘러가는 통로를 내주어야 깨끗하고 새로운 물이 그 자리에 돌아온다. 이처럼 고여 있던 사랑도 많이 퍼낼수록 새로운 사랑이 들어오고 사랑의 통로를 내주면 언젠가는 맑은 사랑이 그 자리를 메워주는 날이 돌아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