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길 한가운데 분주하게 달리는 차들은 목적지를 향해 경적을 울리고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그럼 저기 저 달리는 자동차들처럼 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지금까지 힘든 삶을 살아오면서 내 자신을 위해 경적을 울려 본적이 있기나 한 걸까? 만나는 장애물마다 두려워서 겁쟁이처럼 웅크려 있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치면서 아파하지 않았던가?
그 동안 마음은 항상 꿈을 향해 달리려고 발버둥질 쳤지만 나는 그런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고 어리석은 판단과 선택으로 오늘을 견뎌온 자신이 미웠다. 혼잡한 마음을 정리하면서 도심의 공기를 가로질러 무거운 발걸음으로 언니네 집을 향했다. 지금까지 견뎌오면서 헤쳐 나아가야할 현실이 있다면 주어진 삶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 나는 문을 똑똑똑 두드렸다.
갓 태어난 공주님조카의 잠을 깰 가봐 살며시 문을 열어주는 형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였다. 나는 살며시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아기를 출산하고 산후조리 하느라 출소하던 날, 마중을 못 갔다고 언니는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엄마와 아기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천사 같은 아기의 달콤한 잠을 방해할 가봐 언니와 나의 대화가 소곤소곤 들리는 아주 작은 목소리와 함께 가벼운 공기를 타고 살랑살랑 날아다녔다.
처음에는 쌓여있던 원망의 불씨를 터뜨리려고 따지러 온 거였지만 막상 무사히 출산한 건강한 아기와 언니와 행복에 젖어있는 형부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 짧은 생각으로 인한 내 선택이 하마터면 언니의 행복한 일상을 깨트릴 뻔했다.
당장 갈 곳이 없는 나를 언니 집에 있으라고 만류했지만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돈 봉투를 호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강한 나는 갓난아기의 생활에 보탬이 되라고 끝내 받지 않고 거절했다. 그렇게 무일푼이 되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반나절이나 길에서 헤매다가...
한참을 걸으니 다리가 여기저기 쑤셨다. 길 옆쪽에 보이는 계단에 앉아서 숨을 돌리려는데 운 좋게도 숙식제공을 해주는 일자리 전단지가 눈에 띄었다. 표시된 주소를 향해 걸어갔다. 자그마한 식당이었는데 주방장은 아담한 식당에 비해 덩치가 컸다. 사원을 모집한다기에 들어왔다고 하니 오늘부터 일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바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아침저녁으로 손님이 많아 일이 힘들며 월급은 많이 벌면 많이 주고 적게 벌면 적게 주니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하였다.
어찌되었든 교도소에 비하면 밖에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소중하며 무엇보다 자유와 희망이란 생각이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서 나를 구원해주고 해방시켜주었다. 거기에다 돈을 벌 수 있다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돈의 액수보다 행복한 일자리가 있음에 감사하게 생각하였고 숙식제공을 해준다는 조건이 나를 다시금 일어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식당안의 사람들이나 식당 밖의 사람들은 일이 힘들고 삶이 힘들고 인생이 힘들다고 환경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면서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술 한 잔이 몸에 들어가면 낮에 있었던 일들을 잊고 싶어 하고 생각나는 것들을 잊고 싶어 하며 세상을 잊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술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마실수록 생각나고 괴로울수록 더 힘들어짐을. 바꿔서 기쁠 땐 더 기쁘게 해주는 마법도 있긴 하다. 때문에 사람들은 술로 온 몸을 소독하지만 생각까진 소독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술은 마실수록 마법을 지니기도 하고 실수도 하면서 배로 괴롭고 배로 기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 소독을 잘 못하면 진짜 독이 됨을.
그래도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술술 넘어가서 술일까?
나도 아마 그랬을 게다. 원래 성격이 괴벽한데다 자존감이 낮은데다 세상이 원망스러운데다 술을 만났더라면 둥그런 세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꾹꾹 누르면서 모나게 생각했을 게다. 하지만 교도소라는 작은 지옥에 갇히면서, 혼이 나면서부터 자유와 희망이란 한줄기의 빛을 마음에 품었고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친절한 사장님 덕분에 하루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고 퇴근하면 포근한 잠자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낮이 되면 손님들과의 즐거운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마음을 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보이고 삶이 그려진다.
그렇게 세상이 살만해지고 희망이 생긴 나에게 첫 월급봉투가 손에 들어왔다. 설렘을 안고 나는 이 돈으로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 동안 삶을 잘 살고 싶어 애써온 내 자신한테 책과 연필을 선물하기로 하였다.
어릴 때부터 삐뚤어진 생각을 가진 내게 고장 난 마음부터 청소하고 수리하고 리모델링하고 싶어졌다. 책과 연필을 사서 삐뚤어진 생각을 종이위에 긁어내다보면 정리정돈이 될 것이고 좋아하는 쇼핑을 하여 예쁜 옷으로 기분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달콤하고 아름답게 바르게’ 라는 자그마한 희망에서부터 시작하려고.
때마침 오늘은 쉬는 날이다. 이번 달에 쓸 용돈을 따로 챙기고 백화점으로 신나게 달려갔다.
모델에 걸쳐진 예쁘고 아름다운 옷들이 윙크를 보내는 것 같았고 사고 싶은 것들이 도처에서 손짓하였다. 속으로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하고는 3층을 향했다.
수많은 종류들로 빼곡히 진열된 알록달록한 예쁜 필기구와 책들은 서로의 매력을 자랑하며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걸로 골라 사고 돈을 치렀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련을 참고 견뎌왔던가? 이제야 인생이 살만해지고 새로운 삶을 찾은 나는 드디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지금 이 순간의 소소한 즐거움과 일상을 만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