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한 언니

by 도라지

그날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공기 중엔 미세먼지도 없고, 비나 눈도 없는 맑고 화창한 11월 중순의 토요일이었다. 오래된 네비에는 나오지도 않는 오창 시골의 어느 야산 근처가, 그날 오전에 내가 가야 할 목적지였다. 티맵에도 잘 나오지 않는 이곳을, 해마다 11월이면 어김없이 다녀간 지가 벌써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이다. 친구 부모님의 농막이 있는 곳이다.


오창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남편이 나보다 그쪽 지리를 더 잘 알고 있다. 이럴 땐 네비 대신 남편의 기억력에라도 의존해야겠다. 보아뱀을 그려달라고 했던 어린 왕자처럼, 빈 종이 한 장을 남편의 코 앞에 들이밀었다. 아니, 보아뱀이 아니고 어린 왕자가 좋아하는 장미꽃을 그려달라고 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림으로 길 좀 설명해줘요~"


남편이 잘 보라며 동서남북을 찾아서 큰길을 따라 그림을 그리다가, 종이 위에서 볼펜이 뱅글뱅글 돌았다. 운전해서 찾아가라고 하면 찾아가겠는데, 그림으론 설명을 못하겠단다.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시골이란 곳은 대개가 그러할 수밖에 없다.


무작정 차에 시동을 걸고 오창으로 향했다. 기억의 본능을 따라 움직이며 어느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 전화를 걸어 농막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차를 움직여본다. 허투루 헤매지도 않고 단박에 농막 앞에 이르렀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 가끔 이런 날들이 인생에 찾아온다.


세종에 살고 있는 친구의 언니와, 청주에 살고 있는 막내네 가족들과 친구가 아침 일찌감치 와서 어제 절인 배추를 씻고 있었다. 부모님은 연세도 많으신 데다 두 분 다 여기에서 일하시다가 넘어지신 적이 있다. 바닥이 약간 경사까지 진 곳이라 수돗물 틀어놓고 배추 수백 포기 씻는 작업을 할 때마다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평생 잰걸음으로 움직이셨던 어머니는 그날도 부지런한 노동력을 또 아끼지 않고 쏟아내셨다. 팔순 어머니의 거침없는 일머리를 나는 감히 좇아가지도 못한다.


뒤이어 서울 큰 남동생네가 도착했다. 어제부터 동원되어 배추 뽑아 나르고 소금에 절이느라 고생했던 다른 형제들이 슬며시 눈총을 주었다. 금요일까지 직장 생활하고 토요일 새벽부터 김장하러 내려오는 일은 쉬웠겠느냐고 내가 역성들듯이 말하자, 제일 맏이인 언니가 나에게 노선을 잘 정해야 한다고 으름장 섞인 농담을 던졌다.


객식구인 내가 서울서 내려온 큰 남동생에게 이문세 곡들을 틀어달라고 요청을 했다. 늦가을 하늘과 어울리는 목소리는 역시 이문세 아닌가. 농막 앞 수돗가에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앉아서, 배추를 3단계 공정으로 씻고 있는 세명의 여자 뒤에서 이문세의 <옛사랑>이 흘러나왔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노동인가. 이문세 노래를 들으며 파란 하늘 아래에서 배추를 씻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굽고 삶은 돼지고기에 버무린 김장 속을 얹고 바다 냄새나는 굴을 올리고 걸쭉한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먹었다. 호사스러운 점심이었다.


수술 후 막걸리를 한잔씩만 가볍게 하시는 아버지가 막걸리 한잔 하시더니, 나더러 호적을 파오라고 말씀하신다. 농막이 앉아 있는 이 야산 일대가 다 친구 아버지 땅이다. 청주시가 발표한 개발 계획에 이 땅도 들어가 있다고 남편이 말해주었다. 부자 새아버지가 생길 판인데, 호적을 못 파올 이유가 뭐 있겠는가.


"아버지, 호적 파오면 저 새로 시집도 보내주는 거예요?"


이만큼 나이 먹어서 시집 한번 더 가는 게 귀찮을 법도 한데 새로 시집이 가고 싶은 건지, 호적을 옮겨서 부자 아버지 덕을 좀 보고 싶은 건지, 나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어느 게 진짜였던 마음인지 그건 나도 아리송하다.


점심을 먹고도 절인 배추 세척 작업이 계속되었다. 서울 큰동생 와이프와 청주 막내동생 와이프랑 나란히 셋이서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배추를 씻는다. 힘들어서 다시 막걸리도 한잔 쭈욱 들이켰다. 옆에 있던 막내 올케도 힘이 들었던지 막걸리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마시며 내게 물었다.


"언니는 어떻게 이렇게 잘 어울리세요? 형님이 없어도 언니 혼자 아버지 병실에 계셨다면서요~"


며칠 전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도 친구는 근무하러 올라가고, 나만 아버지 병실에 남아서 부모님과 같이 수다 떨었던 기억이 났다. 2인실에 마침 다른 환자가 없어서, 아버지 어머니와 따로 하나씩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바퀴가 달린 키가 낮은 보호자 침대에 벌러덩 누웠었다.


"그냥 언니 아니고 '고생한 언니'라서 그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 불편할 게 뭐 있겠는가. 그냥 언니 아니고 고생한 언니라서 어느 곳에서건 잘 어울리는 거라고 나를 설명해 주었는데, 막내 올케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어제 친구의 막내 올케가 내 브런치에 구독자로 오셨다. 이제 그녀도 내 글을 읽으면서, 내가 그때 했던 '고생한 언니'라는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집에 꼽사리로 얹히든 깍두기로 끼어살든 무엇이 대수랴. 그냥 하늘빛 좋은 농막에서 늦가을의 어느 하루, 이문세의 <옛사랑>을 들으며 김장 품앗이를 했던 기억이 좋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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