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에 눈이 내렸다

by 도라지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여자의 어머니가 나의 친구다. 나와는 띠동갑인 친구라서 나는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이전 글 가운데 <밥 잘 사 주는 늙은 언니>에도 이미 등장했던 언니는, 코로나 시국에 전세버스 두 대를 계약해서 청주 사람들을 서울로 몰고 갔다.


부모도 능력자인데 따님은 더 능력자라서 청담동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도 오랜만에 굽이 높은 부츠를 신었다. 청주 시골사람이지만, 청담동에 도착하면 청담동에 걸맞은 품격을 유지해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전세버스에 타고 가는 사람들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여성분들은 모피코트를 많이 입고 전세버스에 승차했다.


오후 세시 결혼식이 끝나고 웅장하게 치장한 호텔 계단을 모피코트 사모님들이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평소에 신던 운동화가 아니라서, 나도 덩달아 저절로 허리가 꼿꼿하게 펴지고 걸음걸이마저 느릿느릿 점잖아졌다. 모두들 저 혼자만 우아하게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데, 창밖으로 하얀 눈이 펄펄 내린다.


청주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호텔의 커다란 유리문 앞으로 잔뜩 몰려들었다. 네시 반에 오기로 되어있는 전세버스를 기다리며, 모피코트를 입은 사모님들도, 교장선생님으로 혹은 대학교수로 퇴임한 분들도 호텔 유리문 앞에 단체 학생들처럼 서서 함박눈을 바라보았다.


우르르 몰려있으면 다 똑같이 청주 시골서 올라온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호텔 내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무심히 지나치면 보이지 않는 벽면에 썩 빼어난 작품 몇 점이 걸려있었다.


따로 전시회를 가지 않고도 어느 곳에서 우연히 좋은 작품 하나를 만나는 것은 분명 횡재수다. 수고하지 않고 지적 탐욕을 충족시키는 순간을 누릴 수 있으니 횡재한 날이 맞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날에는 지적 탐욕스러움마저 그림처럼 아름답게 바꾸어놓는다.


유리문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다시 줄을 지어 전세버스에 올라탔다. 혹시 낙오자가 있는 건 아닌지, 버스기사가 담임선생님처럼 승객수를 확인했다.


키가 낮은 청담동의 담장 위로 굵은 한 겹의 테두리를 그리며 흰 눈이 소리 없이 쌓여 있었다. 갤러리 앞 도로에 쌓인 눈을 흰색 목장갑을 낀 남자가 모자도 쓰지 않고 눈을 치웠다. 남자의 손에 쓸리어간 자리에 어느새 눈이 다시 내려앉았다. 앙상하게 제 몸을 드러낸 가로수들이 빈 가지마다 눈들을 이고 서있었다. 검은색 우산 하나를 받쳐 든 젊은 남녀가 눈 내리는 청담동 거리 위에 서있었다. 한 개의 우산 속에 들어있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간다. 버스 창밖으로 하얀 눈이 날리고, 청담동 거리 위에 사람들이 오고간다.


집에 돌아와 오늘 서울에 내렸던 함박눈을 회상하고 있을 때, 혼주였던 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언니, 다음번에 아드님 결혼할 때는 제주도 가서 하면 어때? 1박 2일로 비행기 타고 다녀오게~"


남편도 없이 혼자서 전세버스에 올라타서 다녀온 서울 청담동의 추억이, 오늘 내 기억 속에서 기막히게 좋았나 보다. 오늘 청담동에 눈이 내렸다. 내 마음에도 하얀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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