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대략 30일 간격으로 쌀 20kg을 소비한다. 성인 기준 한 끼당 180그램의 밥을 먹는다고 가정할 경우, 성인 네 명이 집에서 꼬박꼬박 한 끼는 매일 먹는 셈이 된다. 그런데 밥만 먹겠는가, 라면도 먹고 고기도 먹는 걸 감안해보면, 코로나 이후로 줄곧 나는 밥만 하고 있는 것 같다.
다행히 남편은 아침에 밥 대신 콩떡과 두유, 과일 등을 먹는다. 그래서 아침상 차리기가 매우 수월하다. 그런데 문제는 응급실 3교대를 뛰는 간호사 큰아들이다. 입맛이 미슐랭급 수준인 큰아들은 영양떡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흔한 빵도 잘 먹지 않는다. 3교대 근무로 매일 지쳐있는 아들 녀석을 위해, 나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밥상을 차린다. 새벽에 일어나서 부지런 떠는 삶을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던 내가, 다 늙어서 자식 때문에 새벽 밥상을 차리고 있다.
작은 아들은 군 제대 후 복학 시점에 코로나가 터져서, 제대 후 지금껏 근 이년 동안 집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 아이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수염이 거무튀튀한 아들들과 한 집에 살려니까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다. 먹는 음식의 분량부터가 다르다. 계란말이 할 때도 계란 10개는 기본이다.
엄마가 지혜롭지 못해서 자식들을 자립적으로 키우지 못했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 힘닿는 데까지 가사 노동자로 살 팔자인가 보다. 집에서 남편 사무실 일도 간간이 하지만, 그런 건 일 축에도 끼지 못한다.
오늘은 작은 아들이 계절학기 수업으로 신청한 과목 중에 현장봉사가 있는 날이었다. 아마도 날짜 조정이 가능했을 것도 같은데 여자 친구와 성탄절을 같이 보낼 생각에, 무리하게 다른 과목 수업과 하필이면 겹치게 배치해 놓은 것 같았다. 작은아들은 군 제대 후 전과목 A플러스를 기록 중이다. 군 입대 전 1학년 때 C플러스를 받은 과목이 걸렸었는지, 계절학기로 다시 그 과목을 신청해서 재수강하고 있다.
오늘 하루만, 작은 아들은 온라인 수업에 나를 대타로 앉혀놓고 봉사 활동을 나갔다. 어제저녁 온라인 수업 참여에 대한 교육을 엄마에게 시켜놓고도 못 미더운지, 접속 절차를 꼼꼼하게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다시 나에게 전송했다. 녀석에게 흐르는 피는 내 유전자가 맞다.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봉사활동 나간 작은 아들을 대신해서 내가 노트북 앞에 앉아 세 시간 강의를 잘 들었다. 나쁜 짓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닌데, 생소한 분야에서 하는 새로운 나쁜 짓에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엄마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들은 접속해서 출석한 뒤 녹화 기능만 작동시켜놓고 딴 일을 보라고 내게 신신당부했지만, 나는 모니터 앞을 줄곧 떠나지 않았다. 중간에 한번 십분 쉬는 시간에만 자리를 움직였다.
물리학은 내 평생 처음 듣는 과목이었다. 가속도와 속도 중에 측정하기 편리한 물리량은 가속도란다. 변화량과 상관이 있는 가속도는 비행기 블랙박스에 저장되어 있기도 해서, 비행기 사고 후 블랙박스를 회수하는 것도 속도가 아니라 가속도를 살펴보기 위함이라고 했다.
델타와 감마 이야기가 나오면서 정신줄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노트 정리까지 해가며 강의를 들었다. 등가속도 파트에선 도저히 노트필기마저 불가능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강의는 끝까지 들었다. 이게 이렇게 최선을 다할 일이 아닌데, 나는 사소한 어떤 것에도 늘 죽을힘을 다하는 이상한 구석이 있다.
공부하는 게 체질에 맞는다는 걸 대학원에서 철학 공부할 때 깨달았었지만, 물리학마저 강의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 일찍 퇴근해서 들어오던 남편이, 아들 방 책상 앞에 앉아 아들 대신 강의를 들으며 노트 필기까지 하고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공학도가 되었던 남편은 기호와 부호로 등식화되는 모든 것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아침 여섯 시 십 분에 집을 나서는 큰아들의 새벽 밥상을 차리고, 오후엔 작은 아들 대신 물리학 수업을 듣고, 남편 사무실 일을 잠시 처리하고 마트를 다녀왔다. 대단히 요란한 걸 요리할 줄도 모르지만, 한 달에 20킬로 쌀을 소비하는 밥상을 차리려면 이틀마다 한 번은 동네 슈퍼라도 다녀와야 한다.
이년 동안 밥만 해대느라 학교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그나마 물리학 강의라도 들을 수 있어서 재밌는 하루를 또 살았다. 다시 학생이 되어 학교에 가고 싶은 소망이 새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