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날 남편은 하루 종일 찌푸려있는 날씨에 골프를 나가더니 저녁도 먹고 오겠다고 했다. 둘째 아들은 봉사활동 후 유성에서 대학 후배들과 술 먹고 후배 집에서 자고 올 계획으로, 아예 가방을 챙겨서 대전으로 출발했다.
새벽에 근무 나간 큰아들이 오후 세시에 퇴근하자마자, 나는 비빔국수를 말고 소고기를 굽는다. 이브날인데 응급실은 점심에 피자 한쪽 먹을 시간밖에 못 뺄 만큼 바빴단다.
크리스마스라고 사람들이 지나친 음주에 과식까지 겹쳐서 응급실로 실려오는 환자들이 더 많은 날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큰아들과 동갑인 청년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컨베이어에 얼굴과 목 쪽이 끼는 안타까운 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왔는데, 연락받고 달려온 어머니가 우는 모습에 아들 녀석의 마음도 덩달아 무너져 내렸단다. 크리스마스이브날에 종합병원 응급실 상황이었다.
매일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하루에 대여섯 번은 식탁을 차리는 나의 수고쯤은 행복한 가사 노동일뿐이다.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응급실에서 만난 환자들의 슬픈 사연은 사연인 거고, 배고팠던 아들은 비빔국수에 소고기를 맛있게 먹고 대형 PC 모니터 앞에 앉아 신나게 게임을 한다.
저녁때가 되어 소고기 뭇국을 끓이고 고등어를 굽고 두부조림을 하고, 남은 두부는 지져서 볶은 김치랑 저녁 밥상을 차렸다. 이브날엔 와인 한잔 해야 하는데, 기왕 지져놓은 두부가 있으니 냉장고에 일주일째 들어있던 막걸리병을 꺼내서 한잔 따랐다. 큰아들과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일곱 시 삼십 분, 남편이 케이크라도 하나 사가느냐고 전화로 물어온다. 큰아들이 기분이니까 치즈케이크 하나만 사다 달라고 했다. 케이크 사 가지고 올 아빠를 기다리던 스물 여섯살 큰아들이 피곤하다고 아홉 시 무렵 방으로 들어갔다.
아홉 시가 넘어서 케이크 상자 하나를 든 남편이 현관문을 들어서며 큰아들 이름을 부른다. 벌써 잠이 들었는지 아들 방에서 대답이 없다. 남편이 전화를 건 시간과 집에 들어온 시간은 불과 한 시간 삼십 분 차이인데, 그 사이 큰아들은 잠이 들고 나는 마음이 뾰로통해졌다. 내가 한 마디 하고 남펀한테 다섯 마디 들었다. 이제 그 한 마디마저 안 하며 살기로 했는데, 내가 언짢아진 내 기분에 졌다.
오늘 크리스마스날 새벽에 일어나 밥상을 차리려고 하는데, 큰아들이 치즈케이크랑 과일만 먹고 출근하겠다고 한다. 어제저녁 아빠에게 사달라고 부탁해놓고는 그냥 잠들어버린 게 미안했던 건지, 본인의 의무라도 되는 냥 큰아들은 아침으로 우유와 치즈케이크를 먹고 출근했다. 아침에 따뜻한 밥과 국을 먹던 애가, 크리스마스날 차가운 우유와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먹었다.
아들이 먹다 남기고 간 치즈케이크를 내가 먹는다. 차가운 우유 대신 믹스커피 한 잔을 타서 함께 먹었다. 성탄절의 의미는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하던데, 오늘은 남편과 더 평화로운 하루를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본다. 한 시간 반 걸려 치즈케이크 사 오느라고 고생한 남편 아닌가..
별다를 거 없는 또 하루지만 그래서 특별한 오늘 하루를, 하늘이 가깝게 보이는 산길이라도 남편과 함께 걸으며 예수의 탄생 의미를 다시금 짚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