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보이는 것들

by 도라지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산책 코스를 찾아 걷는 습관은 코로나 이후로 우리 부부에게 새로 생긴 습관이다. 코로나 전에도 우리 부부는 낯선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사람들이 붐비는 유명한 관광지 외에 그 도시에 딸려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우연히 들어가 보는 것을 즐겨하곤 했었다.


지난여름의 어느 저녁이었다. 금강 줄기를 따라서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다가 옥천 상계체육공원에 주차를 해놓고 근처 마을로 걸어올라 가는데,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뒤섞여 한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 여고 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


아, 저 노래는 나도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남편만큼 잘 따라 부르지는 못하는, 옛날 옛적 가요 <여고시절>이 아닌가. 그 여자의 목소리가 비록 한여름밤에 어울릴 만큼 청아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아주 느린 걸음으로 그 집 담장 옆을 지나갔었다. 반짝이는 불빛, 고기 굽는 냄새, 마당에 피워놓은 화로에서 타닥타닥 숯불이 튀어 오르는 소리들이 묘하게 뒤섞여, 그녀의 탁한 음색마저 곱게 물들이던 여름밤이었다.


남편은 그날 들었던 여고시절을 따라 부르며, 일주일 뒤에 다시 그 마을을 찾아갔다. 여자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던 옆집에 남편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정원수에 물을 뿌리며 장미꽃 덩굴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편이 시골 사람답게 무심스레 인사를 건네며, 그 동네 집값 시세를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았다.


남자는 사 년 전에 세컨드 하우스 목적으로 이 집에 이사 와서 현재 시세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라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날 우리는 조사관처럼 동네의 막다른 골목까지 걸어 올라갔다가 다시 꼼꼼하게 살피며 내려왔던 적이 있다. 노후에 이런 마을에서 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을을 눈여겨보아 두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가을의 그 마을 풍경은 보지 못한 채 겨울이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한파 뉴스가 뜬 날, 우리 부부는 다시 그 마을에 들렀다. 대부분 세컨드 하우스로 사용하는 집들인지, 노랫소리가 들리던 집도 장미덩굴이 무성했던 옆집도 인기척 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여름엔 나무와 풀들이 무성해서 보이지 않았던 담장 너머 그 집 마당의 모습도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였다. 저기쯤에서 타닥타닥 불꽃이 타올랐던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지난여름의 흔적은 사라지고 갈색 낙엽들만 무성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 숲 속에 사는 새들도 따사로운 햇볕에 몸을 녹이러 해가 드는 길가 쪽에 나와 앉아 있었다. 호수 바람이 바다 바람처럼 매섭게 느껴지는 날에, 물길을 따라 데크길을 남편과 함께 십오 분쯤 걷다가 내가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손 시러워요~"


"장갑 꼈잖아. 아~ 그 장갑은 손 시러운데.. 경찰청이든 국방부든 분명히 비리가 있는 게 틀림없어. 저들이 그 장갑 껴보고 근무해봐야 돼, 손 시러워서 추운 날 밖에서 근무설 수 있겠나?"


제대한 아들이 의경 시절 꼈던 장갑을 끼고 나온 내 손을 보며, 남편은 국방부 비리까지 언급했다.


"기왕 나온 거, 조금만 더 걸읍시다~"


그만 차로 돌아가자고 하는 나를 구슬리려는 남편에게 내가 말했다.


"그럼 장갑 바꿔서 껴요~"


나는 남편이 끼고 있던 털이 수북한 장갑을 바꿔 끼고, 남편 손에는 의경 장갑을 끼워주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강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을 걸었다.


겨울이 되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숲 속의 나무들도 푸르른 여름에는 무성한 자기 잎들을 달고 있어서 제 그림자를 온전하게 비추지 못한다. 저 멀리 숲 속에 있는 나무들이 잎들을 떨구어내고 빈 몸으로 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 년 만에 다시 보는 벗은 나무들의 그림자였다. 겨울은 벌거벗은 제 몸을 통하여 남의 것까지 보여준다. 그것이 겨울이 주는 미덕이다.


인생에도 겨울이 있다. 아직 오십 대인 우리 부부는 인생의 가을쯤을 살고 있는 것이겠지만, 인생의 혹독한 겨울 같은 날들을 함께 겪어왔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만 보이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데크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길에, 맞은편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굽은 허리로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오고 계셨다. 강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분의 발걸음이 가뿐하다. 두 분이 서로 마주 잡은 손에는 의경 장갑보다 따뜻한 장갑이 끼워져있으면 좋겠다.


내가 몸을 돌려 분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할아버지의 검은 옷 등에는 <KOREA ARMY>라는 하얀색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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