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이 내민 휴대폰 단톡방엔, '속보'라고 띄워놓은 메시지 말고도 유정이 남긴 메시지들이 연달아 올라와 있었다.
<간호조무사 장하은, 고졸, 우리 병원 근무 4년 차>
<장하은 자백, 3개월 전부터 오쌤이랑 모텔 다님>
<어쩐지 수상했음, 매일 아침마다 원장실로 들어가서 오쌤 먹을 걸 챙기더라니~헐>
<2년 전 오쌤 이혼했을 때부터 장하은이 오쌤 아침식사 당번 자진해서 함>
<치매 걸린 오쌤 아버지, 저녁에 간병인 역할까지 하은이 했대요, 글쎄>
현경이 은진의 휴대폰으로 유정이 남긴 톡 메시지를 읽는데, 가슴에 열불이 치밀어 오른다. 민재가 이 년 전 이혼하고 난 뒤, 일 년 후에 현경도 이혼을 했었다. 은진이야 삼 년 전 사별해서 지금 혼자 살고 있지만, 현경의 이혼 결정에는 민재에 대한 짝사랑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현경의 어머니는 현경이 초등 6학년 때 가출을 해서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이혼 서류에 도장도 찍지 않은 채, 현경 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남동생은 검사가 되어 아버지가 홀아비로 자식 둘을 키워낸 설움과 한을 말끔히 씻어드렸다.
혼자 바깥에서 떠돌아다니던 어머니가 현경을 다시 찾은 건, 현경이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아 기르고 있을 때였다. 췌장암 말기 선언을 받은 어머니를 현경이 병원에 모시고 다녔다. 박사 출신의 남편은 다른 지역 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사택에서 현경과 따로 떨어져 지낼 때여서, 현경이 병든 어머니를 간호했던 6개월의 기간을 못 본 척 눈감아 주었다. 두뇌가 우수했던 현경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남편의 어머니 병간호를 했던 2년의 세월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었다.
현경은 시어머니 간병의 수고 덕분에, 어린 현경 남매를 두고 집 나갔던 현경 어머니의 병간호에 대한 구실을 남편으로부터 얻은 셈이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이 주는 거래 행위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곳에서도 언제나 남편의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게 했다. 현경이 엄마 장례식을 치를 때, 아버지가 현경에게 말씀하셨다.
"애써줘서 고맙다, 현경아~ 네가 집 나간 엄마를 미워하지 않고 불쌍하게 여겨서 병수발까지 들고, 이게 다 내 잘못이다. 나를 용서해다오~"
아버지가 스스로를 탓하며 어머니를 언급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현경은 어릴 적에 부모님이 다투다가 결국엔 엄마가 아빠한테 맞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아빠의 형제들이 사고를 치고 일을 저지를 때마다, 그 뒷수습을 하던 아버지와 그걸 반대하던 엄마가 대립해서 다투시곤 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으시고 퉁퉁 부은 얼굴로 가방 한 개를 싸서 집을 나가셨을 때, 현경은 남동생과 곤히 자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슬픈 기억과 아버지에 대한 가슴 저린 추억 때문에, 현경은 그녀의 인생 사전에서 '이혼'이란 단어를 아예 삭제시키고 살았었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결혼을 마치 장사하는 것처럼 늘 계산적이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남편과 살면서, 현경은 숨이 막히고 인생의 의미마저 상실된 것 같았다.
아이들만을 삶의 지표로 바라보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소모적이고 허탈했다. 두 아이가 다 대학생이 되고 난 뒤, 현경은 이십 년 동안 막연히 잠재워두었던 이혼을 실행에 옮겼다. 거기엔 이미 이혼해서 혼자가 된 오민재라는 목표점이 듬직하게 서있었다.
그 목표점이 소멸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현경은 단 한 번도 하은을 요주의 인물 선상에 올려놓은 적이 없었다. 미처 살펴보지 못한 곳에 얼토당토않은 복병이 숨어 있었다는 것에 화가 치밀어올라 걷잡아지지 않았다. 은진이 신화 병원장의 사촌 동생이라 해도 은진의 권력은 신화병원 간호이사로 끝날 권력에 불과했다. 현경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데다 여성적인 매력은 눈을 씻고 한참을 찾아봐도 한 군데도 없는 아줌마다. 은진이 제 아무리 신화 병원장의 파워를 믿는다 해도, 신화병원을 떠난 민재가 은진에게 아쉬울 건 없었다.
현경은 민재 병원에 근무하는 이삼십 대 젊은 직원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터였다. 민재 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최유정도 현경의 상대는 아니었다. 최유정은 아직 유부녀인 데다가, 제 아무리 치장을 하고 피부에 돈을 쏟아부어도 오리지널 불변의 법칙을 이길 수 없는 시시한 미모의 소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