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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08.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3

가지가지 사연들을 고 있는 여인네들 속에서 박태성은 심기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이력과 아주 무관할 순 없지만, 박태성은 택견 수련을 하며 사람들의 몸과 건강을 연구하다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여자와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우려면 일대 일로 만나는 편이 백번 낫다는 것을 박태성은 일찌감치 깨달은 바 있다. 여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풍기는 화장품과 향수 냄새를 남자가 즐길 수 있으려면, 화장품 회사의 연구원쯤 되거나 아니면 술에 잔뜩 취해서 이성이 마비된 상태 정도는 되어야 한다.


여자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남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달라고 고요하게 아우성치는 미묘한 공기 속에 남자가 덩그러니 홀로 던져져 있을 때는, 꿀이 아니라 독을 뿜어내는 꽃밭에 앉아있는 아슬아슬한 나비가 된다. 자칫 독을 한 모금 흡입하기라도 하면 나비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기도 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그 부상이 자신의 사업이나 인생에서 어떠한 결과로 연결되는지조차 처음과 중간엔 알지 못한다.


2층 사과나무 여사장 진현주는 대구에서 한 때 중학교 무용 선생을 했었다. 이혼 후 고향으로 돌아와 곧바로 야채청과 가게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이년 정도 하다가 청과 일을 접고 한정식집 주방에서 보조로 삼 년간 일을 했던 진현주는 집 근처에 한정식집을 개업했지만, 권리금 조금 얹어 받고 이년만에 식당을 넘긴 뒤에 청진빌딩으로 들어와서 퓨전 레스토랑을 차린 지 이제 오 년째 되었다.


사과나무는 진현주의 남동생인 변호사 진현기의 주변인들을 단골로 구축해놓고 주로 예약제로 운영되는 레스토랑이어음식값과 주류값이 조금 비싼 편이다. 진현주는 사과나무를 오픈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박태성을 초대해서 술과 식사를 대접하며 그녀의 속사정을 털어놓았었다. 


진현주는 박태성을 처음 봤을 때부터 태성이 싫지가 않았다. 태성의 몸은 품이 헐렁한 한복으로 가려져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무용을 했던 진현주는 박태성의 조용하고 날렵한 몸놀림을 보며 한눈에 그의 몸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전 남편의 고향이었던 대구에서 살던 마지막 일 년 동안 진현주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었다. 남편과 헤어지며 아이 둘을 데리고 청주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오래된 친구처럼 고향은 그녀를 익숙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현주는 이 도시로 돌아와서 잠을 잘 수 있었다. 4층 가죽공방 꾸에로 사장의 낯빛이 칙칙하고 피곤해 보이는 것을 눈치챈 진현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은정에게 물었다.


"은정씨, 혹시 잠을 못 잔 거 아니에요?"


"네, 제가 요즘 불면증이 온 거 같아요."


두 사람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불면증으로 옮겨가자, 박태성이 점잖은 어투로 슬며시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꾸에로님, 근심되는 일이라도 있어요? 생로병사의 간단한 원리만 깨우쳐도 우리가 하는 근심의 80프로는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 인생에서 우리 앞으로 닥쳐오는 일들은 피할 수가 없어요. 그냥 닥치면 닥치는 대로 오게 하고, 피해 갈 일들은 자연스레 피해 갈 수도 있으니 너무 앞서 걱정하지 말고 사는 게 좋아요~"


이은정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올해 마흔넷이 되었다.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어머니의 입원비 때문에 요즘 하나뿐인 언니와 사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은정의 언니 이은희는 갱년기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어서, 은정은 요즘 형부와 조카들에게조차 면목이 없다. 외대 스페인어과에 입학할 때만 해도 은정의 가슴속엔 멋진 꿈들이 가득했지만, 마흔네 살 싱글 여자의 현실은 청진 빌딩 4층에서 가죽을 만지며 임대료와 요양원비, 아파트 분양 등 하나같이 돈 걱정으로 가득하다.


요즘 들어 은정은 6층 말루스 여사장 신재희가 부쩍 부럽기만 하다. 이은정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신재희는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카페는 취미 생활쯤으로 운영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신재희가 청진 학원 이사장 주민국의 애인이라는 것을 이은정은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아직 은정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작은 아파트 하나 갖지 못했는데, 신재희는 버젓이 40평형의 고급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다. 하지만 은정은 늙은 남자의 애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청진 일보의 대표이사인 주성훈 정도라면 모든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숨은 애인으로 지내고 살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주성훈은 은정보다 연하의 남자다. 주민국의 후계자가 자기보다 두 살이나 연상인 여자를 거들떠볼 이유가 없다는 걸 은정도 잘 알고 있다.


미모가 사라지기 전에 든든한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지면서 은정의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몇 년째 은정을 바라보는 박태성의 뜨거운 시선을 알면서도 태성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것도 그놈의 돈 때문이다.


박태성이 존경받는 관장님 노릇에 푹 빠져 사는 동안 세상은 메타버스의 시대를 준비하며 이미 오래전에 전통 무예 택견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통을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형성해서 세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다지만, 50대의 박태성이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기엔 너무 안일하고 허세가 많다. 


20대의 이은정이라면 정신과 신체의 수련을 중요하게 여기는 박태성을 지지했을지 모르지만, 40대의 이은정에겐 생존을 위한 돈이 더 중요해졌을 뿐이다. 어쩌다 이런 여자가 되어버린 건지, 은정은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렵고 못마땅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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