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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14.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6

은정은 어릴 때부터 그랬었다. 엄마가 하는 말들은 하나도 틀린 데가 없이 다 맞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인간을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건 사랑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종교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인간이 지성을 가지고 태어난 목적은 오로지 삶을 이해하고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라고만 했다. 엄마가 말하는 타자에는 우주와 지구, 환경과 동식물들이 다 포함되는 것이었지만,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세상의 온갖 지식과 맞먹는 위대한 것이라고 엄마는 말했었다.


십칠 년 전 엄마가 위암 3기 판정을 받았을 때, 은정에겐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미국의 자동차 디자인 회사에 인턴 합격을 했던 김준수는 은정과 함께 미국으로 가길 원했지만, 은정은 엄마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준수를 따라 미국으로 넘어가질 못했다.


요양병원에서 돌아온 은정은 엄마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토요일 오후지만 다시 공방으로 나왔다. 어찌 보면 딸의 젊은 시절과 노동력을 가져간 엄마지만, 아직까지 은정은 단 한 번도 엄마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


슬프고 고요하고 외롭지만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 찬 은정의 모습은 묘하게 우아하고 감미롭고 쓸쓸한 구석이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은정만의 분위기는, 화려한 여인이 뿜어내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향수와는 다르게 구별되는 아름다운 향기가 잔잔하게 흘렀다. 그녀의 몸에 배어있는 가죽의 꾸리꾸리한 냄새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려고 끈질기게 달라붙어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대부분 남자들은 후각에 충실한 개처럼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가죽의 냄새를 먼저 진탕 흡수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며 달아났다. 엄마의 위암 병세가 호전되어갈 무렵 십여 년 전에도 남자를 두세 번 소개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일과 그녀의 삶을 전부 받아들여주는 남자를 만나질 못했다.


북디자이너를 꿈꾸었던 은정이 일상용품을 만드는 가죽 공방을 운영한 지도 벌써 십사 년이 되었다. 청진빌딩에 들어오기 전에는 허름한 뒷동네에서 작게 공방일을 시작했다. 청진빌딩으로 이사를 오면서 직원도 늘리고 온라인 주문 제작도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 아직 회식 시간이 되려면 삼십 분이 남아있었다. 청진 일보는 편집국과 뉴미디어국을 위시하여 청진빌딩 5층을 다 쓰고 있지만 공무국, 광고국, 기획관리국 등은 4층에 배치되어 있다. 편집국 회식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한 주성훈이 4층으로 들어서다가 불이 켜져 있는 꾸에로 공방 안을 문득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 건물을 삼 년째 드나들면서도 청진일보 상가에 가죽 공방이 있는지조차 눈여겨보지 못할 만큼 바쁘게 살았다.


뉴욕 탠던 공과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브루클린에 멋진 가죽 샵이 있었다. 브루클린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많은 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 카운티 답게 세계 각 나라의 고유한 특성을 살린 상가들이 즐비했다. 성훈은 이탈리아계 상점 주인이 만든 가방이나 신발 등을 주로 구매하곤 했었다. 브루클린 가죽 샵의 장인이 제품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그 가방은 아직도 성훈이 애장하는 소품 중 하나일 정도다.  


아련하게 이십 대의 시절로 돌아가 뉴욕 브루클린을 회상하고 있는 성훈의 눈에, 공방의 유리창을 통해 여주인으로 보이는 한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패턴을 뜨고 가위로 자르고 다시 패턴들끼리의 사이즈를 비교해보고, 혼자서 무슨 고민을 하는 건지 가죽 원단들을 한참을 바라보며 색상을 골라내느라 여자는 무성 영화의 배우처럼 대사 한 마디 없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성훈이 이렇게 한 사람의 움직이는 모습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라보고 있는 줄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공방 안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은정이었다. 그가 주성훈이라는 것을 알아본 은정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공방 문을 열고 나오며 성훈을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그러자 주성훈이 겸연쩍게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공방에 무슨 제품이 있나 보다가 바쁘게 작업하시는 거 같아서 미처 노크를 못했네요."


주성훈은 여자를 향해 애써 변명을 하면서도 '내가 이런 캐릭터가 아닌데'라고 스스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브라운 계열의 가죽 앞치마를 두른 여자의 모습은 사십대로 보이지만 매우 단정하고 고요하면서도 뜨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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