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지 Feb 20.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7

공방의 열린 문 틈 사이로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공방 안에 들어와서 구경하라는 여주인의 중간톤의 음색이 어쿠스틱 기타에 버무려진 므라즈의 음색과 뒤엉켜 거부감 없이 주성훈을 공방 안으로 이끌었다.


한쪽 벽면에는 나란히 서있는 재봉틀이 몇 대 보이고, 조명을 설치해놓은 수납장 속에는 각양각색의 가방들이 쇼룸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파티션으로 구분해놓지 않은 공간 속에는 화가의 작업실처럼 이젤 위에 펼쳐져있는 캔버스가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종이가 아니라 가죽 재질 같았다.


뉴욕 브루클린 가죽 샵에서 종종 물건을 구매했던 성훈에게, 은정의 공방은 물건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상점이라기보다는 부지런한 예술가의 작업실로 느껴졌다. 화이트톤의 사각 마샬 스피커에선 제이슨 므라즈가 부르는 다른 노래가 감미롭게 공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성훈이 뉴욕에서 공부하던 그 무렵, 장난기 많은 소년의 얼굴을 한 제이슨 므라즈가 장르가 불분명한 노래를 만들어서 세상에 나타났었다. 므라즈의 달달한 노래를 들으며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들이 성훈의 혈류를 타고 흐르며 온몸의 세포들을 깨워서 다시 이십대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제이슨 므라즈 음악을 좋아하시나 봐요~"

 

성훈이 공방 안을 둘러보는 사이 어느새 물을 끓여 찻잔을 들고 서있는 은정에게 성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죽 의자이긴 해도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가 놓여 있는 탁자 위에 여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엄마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를 온종일 들어요. 그의 노래를 들으면 다시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고 인생이 살만해지거든요. 그의 노래엔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들이 사라지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엄마가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가 않은 상황이라고 해요. 어머, 제가 처음 보는 대표님 앞에서 별 얘기를 다했네요."


은정은 순식간에 마음에 고여있던 생각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제정신을 수습해보려고 고개까지 가볍게 가로로 저으며 성훈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고여사네>에서 청진 일보 편집국 회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주성훈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슬쩍 <고여사네> 가게 앞을 지나가 보기라도 할까, 어제는 그런 생각마저 했었다. 유명한 연예인같은 사람을 멀리서 바라본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제는 별 허황된 열망 같은 것이 은정의 가슴속에 들어섰었다.


은정은 성훈을 청진빌딩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한 번도 둘이서 대화를 나누거나 따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멀리서 바라만 봐도 참 잘난 사내라는 생각을 하며, 저런 남자의 아내는 어떤 여자일까 궁금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마법처럼 주성훈이 오늘 공방 앞에 서있었고, 지금 주성훈은 은정의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네..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시는군요. 마음이 무거우시겠어요. 저희 어머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는데도 저는 지금도 문득문득 어머니가 그립거든요."


평생을 천주교 신앙 속에서 살다 가신 정이 많았던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성훈은 불쑥 치밀어 오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여전히 감출 수가 없다. 성훈이 마흔을 넘기면서 아버지 주민국을 한 사내로서 더욱 이해하게 되었지만, 어머니 앞에서 보였던 아버지의 뻔뻔하고 파렴치한 태도는 성훈이 한 사람으로서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므라즈는 우리가 인생이나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착각과 슬픔들을 참 아름다운 환상으로 바꾸어 놓는 것 같아요. 노랫말과 멜로디 위에 얹힌 그의 목소리가 저의 슬픈 감정들을 환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게 참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방 여주인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성훈의 귀에 닿아서, 한 음절씩 또박또박 성훈의 마음에 담기고 있었다. 성훈이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를 여자는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어느 화가가 한번 옅은 잿빛으로 칠해 놓은 캔버스에 다른 화가가 비밀스럽게 와서 어두운 잿빛의 물감으로 점점 더 진하게 붓질하듯이, 창 밖으로 어둠이 두껍게 내려앉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하얗게 날리는 눈가루들이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게 보였다. 주성훈의 시선이 창밖으로 던져지고 있는 것을 바라본 은정이 몸을 돌려 어두워지고 있는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다가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외쳤다.


"어머, 눈이 오네요~ 이 건물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바로 이 풍경이에요. 전 여기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이 너무 좋아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내 공간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거예요."


주성훈은 청진빌딩에서 눈이 내리는 청진고등학교와 청진대학교를 바라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이 건물은 지금은 아버지 주민국의 소유지만, 올해 정도에 소유권 이전을 할 계획이다. 세금 때문에 주민국의 많은 부동산을 조금씩 이전하는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 이 빌딩의 관리는 박태성이 하고 있지만, 주성훈은 박태성을 아버지만큼 신뢰하는 편은 아니다. 내 건물에서 이 여자는 행복을 느낄 때가 많다고 하는데, 정작 이 모든 것의 주인인 성훈은 행복을 느껴본 지가 언제인지 문득 자신에게 묻는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 아담과 애플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