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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21. 2022

(소설 ) 아담과 애플 8

박태성은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토요일 오후 청진빌딩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에 있는 청진 일보 회식 자리에 주성훈이 참석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으니, 청진 학원 재단으로부터 월급을 받고 있는 박태성의 입장에선 가만히 집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향후 청진빌딩의 청지기 자리 나마 꾸준히 지키고 있으려면 이젠 주민국이 아니라 주성훈의 충실한 집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박태성은, 주성훈과 약속한 바도 없었지만 자발적으로 토요일 저녁시간을 청진빌딩의 청지기로서 할애하기로 했다.


박태성이 빌딩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주성훈의 차로 보이는 외제차 한 대가 이미 주차장에 서있는 게 보였다. 박태성이 서둘러 일층으로 올라와 고여사네 식당을 슬쩍 넘겨다보다가, 습관처럼 고개를 들어 빌딩을 올려다본다.


청진 택견 수련관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보이는 3층을 사이에 두고, 2층 사과나무와 4층 꾸에로 공방에 불이 환하게 켜있었다. 따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태성의 몸이 어느새 4층 꾸에로 공방 앞에 올라와 있었다.


공방 안 창가에는 어두워진 바깥응시하고 있는 은정의 늘씬한 뒷모습이 우아하고 쓸쓸하게 서 있었다. 은정이 이 건물에 들어온 지도 벌써 사 년이 되었으나, 사 년 동안 은정의 공방에는 이렇다 할 남자가 드나든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태성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은정보다 여덟 살이나 나이가 많은 데다 제대로 된 직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태성은 은정을 향한 마음을 떳떳하게 고백도 못한 채로 막연하고 뜨겁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달려가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태성이 무작정 공방 안으로 들어서려고 공방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이었다. 은정이 디자인한 의자에 앉아서 마치 은정의 뒤태를 감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의 의젓한 뒤통수가 태성의 눈에 번쩍 띄었다.


 남자가 누구이건 간에 상관없이 순간적으로 태성의 마음에 불꽃이 거세게 일어나며, 수컷으로서의 경쟁심과 사냥 본능이 폭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태성이 은정을 바라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은정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런 각도에서 여자가 자신의 뒤태를 보이며 서있다는 것은 여자가 그 남자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마음의 표시라는 것을 태성은 본능적으로 직감하였다. 태성은 그가 끊임없이 염탐하고 있는 은정을 눈독 들이는 또 다른 수컷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시 몸이 떨려왔다. 오십 년을 넘게 살면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불안감이었다.


태성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적당히 침착한 몸짓으로 일부러 공방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저쪽에서 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공방 문이 열리는 소리에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본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박태성이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며, 점잖은 목소리로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아니, 주 대표님이 여기 와계셨군요. 오늘 저녁에 편집국 회식에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여기 와 계실 줄은 몰랐네요. 꾸에로 사장님과는 언제부터 친분이 있으셨던 건지.. "


박태성의 인사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주성훈이 환한 미소룰 보이며 태성에게 악수를 청해 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관장님. 여전히 활기가 넘쳐 보이시고 멋지십니다. 새해 인사도 못 드렸는데, 새해에도 건강하십시오~"


두 남자의 짧은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창가에 서있던 은정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사장님, 내일 등산에 가실 거지요? 오늘 눈이 좀 날리고 있어서, 내일은 가볍게 산성이나 한 바퀴 돌 계획입니다."


청진빌딩의 책임 관리자인 태성은 청진 빌딩에 입점해 있는 상가들의 연합회 회장직을 겸하여 맡고 있다. 빌딩 상가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상인들에게는 청진빌딩이 회사이며 직장인 셈이고, 그들의 점포가 부서인 셈이었다.


상인들의 건강과 친목을 유지하여 행복한 일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박태성은 두 달에 한 번씩 일요일 오전에 등산을 추진하고 있었다. 고여사네 식당이 들어오기 전에 있던 닭갈비집 부부는 두 달에 한번 있는 청진빌딩 상가 연합회 산행을 무척이나 지지했었다.


박태성이 상가 사람들을 이끌고 산행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사 년 전 꾸에로 공방이 청진 빌딩에 입점하면서부터였다. 내일 등산을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은정 대신에 주성훈이 박태성의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 빌딩 상가 연합회분들이 정기적으로 등산을 다니시는가 보군요. 참 보기 좋습니다. 건강에도 좋고 화합과 친목에도 일조하는 거네요. 아주 좋은 기획입니다~"


"주 대표님도 내일 함께 가시겠습니까? 청진 일보 사장님도 저희 상가 연합회 회원이시니까 자격은 충분히 되십니다~"


주성훈은 마침 내일 골프 약속이 취소가 되어 혼자서 등산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마흔이 넘으면서 사람 사는 게 비등비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성훈은, 상가 사람들과 함께 등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묘하게도 저 공방 여주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성훈의 가슴속에서 은밀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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