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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24.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9

소리 없이 날리던 눈이 그치고 청진 빌딩의 사람들은 밤이 되어 모두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박태성은 내일 산행에 주성훈이 참석하겠다고 내뱉은 말을  반신반의하며, 공연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닐까 후회되는 마음이 앞서고 있다.


일오일 오전 열 시에 주성훈이 청진빌딩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청진빌딩 사람들은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중에도 놀란 사람은 6층 말루스 여사장 신재희였다. 주민국의 아들이 어찌 된 일로 이런 사람들과 나란히 승합차에 올라타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왔을까, 성훈의 속내가 몹시도 궁금하고 의심스러웠다.


박태성이 운전하는 15인승 승합차가 산성에 도착했을 때, 하얗게 얼어있는 호수 위로 한두 개씩 눈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신재희가 산길을 오르며 몇 마디 투덜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박태성이, 신재희의 을 잡아끌며 겨울 산행의 정취를 읊어댔다. 2층 진현주가 은근슬쩍 태성의 옆으로 따라붙고, 1층 고주연은 애플힙 강서준의 뒤태를 잠시 넋을 놓고 감상하다가 서준의 옆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사람들이 저만치 앞서 가는 동안, 이은정과 주성훈이 자연스럽게 뒤에서 걷게 되었다. 청량한 푸른 하늘에 떠있는 태양의 밝은 빛 때문에 눈이 부신 건지 아니면 추워서 그런 건지, 꾸에로 여주인이 장갑 낀 손으로 그녀의 등 뒤에 매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장갑 낀 손이 말썽인지 여자의 점퍼에 달려있는 모자가 여자의 얼굴 위에서 접혀 있는 걸 보던 성훈이, 무심결에 팔을 뻗어 여자의 모자를 매만져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눈 오는 날에 산길을 걷는 거 아주 운치 있네요. 제 이름은 주성훈인데, 공방 사장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은정이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은 청진 빌딩에서 연예인 같은 분이세요. 모두들 주. 성. 훈. 대표님 이름은 다 알고 있는 걸요. 저는 이은정이에요."


"그럼 제가 은정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이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건 은정씨랑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서요. 아, 오해는 마세요. 사장님이라는   호칭은 비즈니스 관계를 연상시키는 거 같아서 그래요."


주성훈은 이 여자 앞에만 서면 자꾸만 무슨 변명 같은 것을 늘어놓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일부러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들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박태성의 날렵하고 활기찬 몸이 산등성을 따라 오르며 신재희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올려다보였다. 진현주의 스틱과 발걸음이 덩달아 바쁘게 움직이는 뒤에서, 강서준과 고주연은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1팀, 2팀, 3팀으로 나뉘었네요. 우리가 제일 꼴찌예요~"


"대표님은 한 번도 꼴찌의 인생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시죠? 오늘은 저랑 함께 꼴찌 한번 해보시겠어요? 꼴찌도 나름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까요? 은정씨랑 천천히 걸으며 꼴찌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군요. 진두지휘 하는 관장님도 계시고, 마음 편한 날이네요."

 

성훈은 늘 일등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이끌었고, 세상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다. 등산을 할 때도 목표지점을 향하여 멈추지 않고 전진했고, 그의 모든 삶은 늘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지금 여자의 말을 듣고 보니, 끊임없이 앞으로만 향하여 일등으로 나아가려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한 태도였던 것인지 묻게 된다.

 

"은정씨는 인생에서 지표로 삼는 게 있나요?"


주성훈의 질문에 산길을 오르던 은정의 발걸음이 한순간 멈추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여자가 말했다.


"제 삶의 지표는 사랑이에요. 내비게이션처럼 빠른 길을 안내해주는 그런 사랑 말고요, 등대처럼 언제나 거기에 서있는 그런 사랑요. 제 어머니에게서 배운 사랑인데요, 모든 존재를 향해 그런 자세로 사랑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요. 후훗, 그래서 아직 결혼을 못했나 봐요."


여자는 그녀의 아날로그적 인생관이 쉽지가 않은 거라서 아직 결혼도 못한 거라고 자책 같은 농담을 스스럼없이 던지고는, 언덕을 오르는 걸음을 재촉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요, 사랑도 GPS 방식에 의존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운명적인 사람의 위치를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도 있을까요? 사람도 데이터 속에 입력해서 서로가 추구하는 대상을 찾아낼 수 있는 그런 날이 올까 봐서요.. 그걸 바라고 있는 건지, 그걸 두려워하는 건지, 이젠 제 마음도 제가 잘 모르겠어요."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상대에게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은 낯선 사람 앞에서 이상한 이야기나 지껄이는 수상한 여자가, 두터운 겨울 옷 속에서도 감추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뽐내며 급하게 산등성을 걸어 올라갔다.


바람에 여자의 점퍼 모자가 뒤로 젖혀지며 여자의 어깨 근처에 걸려 있었다. 여자의 긴 머리 위에서 하얀 눈들이 춤을 추며 내리는 것 같았다. 어제 공방에서처럼 성훈의 시선이 온통 은정의 뒷모습에 박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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