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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r 06.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11

이은정은 대학 3학년 때 산재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부유하진 않아도 크게 부족함 없이 지냈다. 은정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던 평화로운 시기였다. 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이나 80년대 전두환 독재 시절처럼 민주주의 투쟁은 필요 없는 사회였으나, 친일파의 후손들은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기득권을 행사하며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해방이 되던 1945년에 태어난 은정의 아버지는 매우 드물게 술을 한잔씩 걸치시고,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가끔 언급하셨다. 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청상과부로 평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은정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자식처럼 꼭 품에 안아주시곤 했었다.


동동주 사발을 든 청진 빌딩 사람들의 팔들이 몇 차례 테이블의 중앙으로 몰렸다가, 사람들은 이제 각각 둘셋씩 그룹을 지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정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주성훈이 은정에게 물었다.


"은정씨는 아까 어디를 다녀온 거예요? 거기는 묘 자리가 있던 곳인데 말이죠."


주성훈의 질문에 은정은 주성훈이 청진 일보 대표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청진 일보 대표님이시니까, 대표님도 그 기사 읽으셨겠군요. 며칠 전 기사에 났던 내용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 가봤던 거예요."


며칠 전 청진 일보가 발행한 신문에는 <친일파 민영휘 둘째 부인의 사라진 묘의 행방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여기 산성 일대에 남아있던 민영휘의 첩 안유풍의 묘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 땅은 이미 십오 년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하여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유풍의 묘는 여태껏 그 자리에 버티고 남아 있었다.  


주성훈은 일제 강점기 때 설립된 청진 학원의 후손으로서, 명문 사학으로 이름 높은 휘문고의 설립자 민영휘의 죄악과 휘문고등학교의 현재형 재단비리 등에 관해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나마 청진 학원은 서울이 아닌 지역에 설립된 학교로부터 출발했으며, 민족 사학의 정신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학교법인 휘문의숙과는 본질적으로 궤도를 달리하고는 있다.


하지만 주성훈은 그의 조상이 일제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은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시대로부터 적된 부가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와 민중에 대해 일종의 채무 의식이 있는 편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국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혹시 은정씨, 독립유공자 후손이세요?"


"네~"


은정은 짧고 깊게 대답했다. 은정의 옆에 앉아 있던 말루스 여사장 신재희가 번뜩이는 여자의 촉을 앞세우며 두 사람의 대화에 요망한 눈빛으로 끼어들었다.


"주대표님~, 왜 꾸에로 사장님을 은정씨라고 불러요? 두 사람이 벌써 그렇게 친해진 건가요?"


그러자 저쪽 끝에 앉아 있던 박태성이 먹이를 도둑맞은 짐승의 거칠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정과 성훈을 바라보았다. 한 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국문학도 출신 강서준이 새로운 로맨스의 탄생을 기대하는 눈빛을 반짝이며 참견을 한다.


"저도 여기 계신 아름다운 여성분들이 '서준씨'라고 불러주면 기분 좋을 거 같은데요. 이름 불러주는 게 뭐 어때요~ 가슴 설레고 듣기만 좋은 걸요. 아예 이 참에 우리 '사장님' 호칭 빼고 그냥 이름 부르기로 하는 건 어떨까요?"


강서준의 뜬금없는 제안에 테이블에 둘러앉은 청진빌딩 사람들의 얼굴엔 싫은 기색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뜻 그렇게 하자고 대답들은 하지 않지만, 모두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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