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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r 07.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12

"그거 재밌겠는데요~ 빌딩에 돌아가선 다시 정중하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더라도, 이렇게 우리들끼리 모여 있을 때는 이름을 불러도 좋을 거 같군요. 나이와 일터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성훈의 호탕하고 논리적인 언변에, 상황은 순식간에 적극적인 찬성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청진 빌딩의 사람들은 주성훈과 강서준을 제외하고 모두 배우자 없이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끼리 모일 때마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단순한 약속 하나를 했을 뿐인데도, 청진 빌딩 사람들의 마음에는 벌써 봄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산성 등산을 마치고 돌아온 이틀 뒤, 고주연은 대전에 살고 있는 동창생의 아내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부고 소식을 들어야 했다. 동창생의 건물에서 아구찜 장사를 하는 동안, 주연은 동창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왔었다.


단순히 혼자된 여자의 밤 시간을 달래 줄 남자로서 동창생이 필요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가 좋아서 그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인지 고주연은 자신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었다. 칠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마누라에게 머리 끄덩이를 잡힌 적도 없이 무사히 대전을 떠나온 것은 순전히 운이 따라준 덕분이었다는 생각을, 엊그제 산성에서 상간녀 위자료 소송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이제 동창생의 아내는 죽었고, 고주연은 조금은 떳떳하게 동창생과 회포를 풀 수도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막상 동창생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도, 동창과 다시 잠자리를 하고 싶은 욕망이 달아오르지 않는 것이다. 조의금만 친구들 편에 보내야 할까 고주연은 망설이게 된다.


어차피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 몸인데, 기왕이면 더 멋지고 활력 있는 남자와 잠자리를 해보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주연의 마음 깊은 데서부터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7년 동안이나 동창하고만 섹스를 나누었다니, 너무 오래 했다는 후회 비슷한 감정마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주연은 남편이 죽고 한창 왕성한 사십 대를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은 동창생과 보냈다는 게 억울하기까지 하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나 보고 싶어졌다.


진현주는 산성에서 박태성이 6층 신재희를 각별하게 챙기는 모습을 그냥 흘려 보았다. 태성이 꾸에로 이은정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신재희가 투덜대며 분위기를 망칠 것을 염려한 박태성이 회원 관리 차원에서 신재희를 돌봐주는 것으로만 여겼다.


현주는 이혼 후 한정식집 주방에서 보조로 음식을 배울 때 무리하게 일을 했던 탓인지, 오십이 조금 넘은 나이에도 벌써 무릎이 약해져서 등산을 할 때마다 스틱을 필히 챙겨가야만 한다. 점심 손님들이 한 차례 빠져나가고, 현주가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을 무렵이었다. 변호사 일을 하는 남동생 진현기가 성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누나, 글쎄 세희 엄마가 로맨스 스캠에 당해서 오천만 원을 뜯겼대. 이 여자 미친 거 아니야? 이거 분명 정신병인 거지? 창피해서 어디에 말도 못 하겠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세희는 진현기의 아내가 키우는 반려견이다. 지인으로부터 새끼 강아지를 입양할 때 현기의 아내가 현기에게 물었었다. 강아지의 이름을 고민하던 진현기의 입에선 인생엔 돈, 건강, 사랑ㅡ세 개의 기쁨이 필요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수컷 강아지는 '세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가끔 사람들은 그 집을 딸애가 있는 집인 줄로 착각을 하곤 한다.


"뭐? 오천만 원? 아니, 니 마누라 제정신이 맞는 거니? 내가 뭐라 그랬니, 걔 언젠가 사고 칠 거라 그랬지? 관상은 못 속여요."


"나 이혼하려고, 그런 얼빠진 여자랑 한 집에서 못 살겠어. 아니, 얼굴도 못 본 놈한테 홀딱 오천만 원을 송금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이 여자 제대로 미친 거야."


진현주는 동생과 전화를 끊고 열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현기의 마누라는 일본어 선생이었다.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택하는 고등학교가 줄어들면서 교사직을 그만두고, 마냥 현기의 수입에 기생해서 여유롭게 사는 귀부인 코스프레의 대명사였다. 예가체프 원두가 어떻고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이 어떻고 입으로 허세 부리는 걸 좋아하는 만큼이나 명품에도 애착이 강하더니 이젠 남자한테까지 집착할 줄이야, 아무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었다.  


현주도 같은 여자로서 올케의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동생이지만 진현기는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니고 집에는 돈만 가져다줄 뿐이었다. 턱이 뾰족하고 입술이 얇은 현기의 마누라는 첫인상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주와 현주 엄마는 현기의 성화에 못 이겨 그 둘의 결혼에 찬성을 했지만, 비쩍 마른 현기 와이프는 끝내 아이를 출산하지 못했다. 남편은 변호사랍시고 밖으로만 나돌고, 애도 없이 혼자 세월을 보내야 하는 여자의 마음속에는 '사랑'을 갈망하는 굶주린 유령 같은 게 하나 들어와 살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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