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 땡기는 날

by 도라지

오늘도 남편이 쓸 마스크팩과, 집에서 먹을 쌀 20kg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곳으로 이사 온 셋째 시누 형님댁에 들여놓을 소파도 집들이 선물로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 계신 친정 부모님 댁엔 한 번도 소파나 가구를 사드려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나를 위한 물건을 마지막으로 주문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지난겨울부터 냉장실 온도가 9도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고장 난 냉장고를 때를 봐서 바꾸려고 기다리는 중이다. 십삼 년 썼으니 바꿀 때도 되었다.


화장품이나 피부업계 관련 직종도 아닌 남편은 피부 관리에 진심인 편이라서, 나는 가끔 홈쇼핑에 나오는 새로운 화장품을 남편을 위해 주문하기도 하지만, 정작 나는 지금도 대중목욕탕에서나 볼 수 있는 대용량 스킨로션을 쓰고 있다.


엊그제 토요일 오전엔 소파에 누워있던 남편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 약은 두 박스만 할게~"라고 말했다. 주방에서 통화 내용을 듣다가 궁금해진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약요?"


"관절약. 진호형이 어버이날 직원가로 나온 약이 있다고 해서."


"그런데 왜 두 박스예요?"


"큰 누나랑 셋째 누나 주려고."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확 상했다. 제 마누라가 무릎이 아프다, 관절이 아프다 했던 말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가 보았다. 게다가 처갓집에 늙은 부모님도 계시는데, 그런 건 생각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사위도 자식이라고 귀하게 거두었던 처갓집 부모님의 은덕은 이미 오래전에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나마 좀 먹고살만하다고 자기 핏줄만 땡기는가 보다.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가 돈 벌어서 시댁에 갖다 바치는 게 억울하다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내가 직장생활을 안 했길 망정이지, 직장생활까지 했더라면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왜 안 사드려? 나도 무릎 아프다고 했잖아."


기어이 내가 한 마디 내뱉었다. 남편이 다시 지인 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네 박스를 주문했다. 평소엔 머리 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남편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처가가 부잣집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별로 영양가도 없는 집안이라는 게 밝혀져서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마누라가 남들처럼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여자라서 그런 걸까.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제껏 남편이 저지른 일의 뒤처리까지 하고 다니며 갖은 풍파를 겪으며 알뜰하게 살아온 내 인생의 값어치가 평가절하당하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비싼 거 좋은 거 누가 몰라서 안 하고 살까. 자기 기분대로 일 저지르고 자기 원하는 대로 좋은 거 먹고 바르고 입고 신고하는 남편이, 지금 생각해보니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세상은 살아남는 놈이 강자고, 부부라는 남보다는 자기 형제가 더 가깝게 여겨지기도 하는가 보다.


욕실 거울 앞에 놓인 마몽드 대용량 스킨을 바르는데, 늙어버린 한 여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초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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