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 1

by 도라지

수해로 몇 명이 죽고 이재민들은 집을 떠나 임시로 마련된 보호시설에 머물고 있다는 재난 뉴스가 며칠 째 계속되던 날, 바깥에는 아직도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휴대폰 벨이 울리며 "친정"이라는 글자가 액정 화면 위로 둥둥 떠올랐다.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수화기 모양을 오른쪽으로 밀었다.


"큰언니가 전자랜든지 하이마트에서 텔레비전을 하나 사 왔다는데, 어디서 중고를 사 왔는지 껍데기만 있더라. 내가 잠깐 나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다녀갔구나. 니가 와서 환불 좀 해봐~"


언니들이 조현병을 앓기 시작한 건 벌써 삼십 년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아니 어쩌면 그 현상은 더 일찍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땐 방문 걸어 잠그고 공부만 하던 큰언니가, 밤잠을 자지 않고 무릎 꿇고 기도했던 게 대학 시절부터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지방 여고에서 전교 1,2 등을 다투는 수재였던 큰언니가 이화여대 약학과를 진학하고 졸업했다는 이유로, 아무도 언니의 병증을 눈여겨 진단하려고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죄짓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그것이 세상살이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순진을 떠나 일종의 무지에 가까웠던 부모님은 그저 딸아이의 성격이려니, 신앙심이 깊어서 밤새 기도를 하는 것이려니 그렇게만 바라보고 싶었을 것이다.


친정집 근처는 다행히 수해가 없었나 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신자들이 가끔 어머니를 성당까지 모셔다 드리곤 한다. 어머니가 외출한 사이, 생활비로 찾아다 두었던 돈 백만 원이 안방 문갑에서 사라지고, 대신에 큰언니 방에 작은 텔레비전이 하나 와있는 걸 어머니가 확인하시고는 나에게 전화를 거셨다. 전자랜드인지 하이마트인지에서 물건이 배송되어 왔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거라고 판단한 나는, 귀가 어두워서 내 말을 듣지도 못하시면서 혼잣말만 쏟아부으시는 어머니의 전화를 그냥 뚝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다행히 새벽부터 비가 멈추고 난 뒤, 오전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스크가 떨어졌다고 하셨다. 별일 없느냐 여쭈니, 없다고 대답하신다. 금요일이라서 오후에 일찍 퇴근한 남편과 가벼운 등산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마스크 등을 싸들고 친정에 우선 들어갔다. 마스크랑 물건들만 전달하고 금방 나와서 상당산성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물건들을 낡은 아파트 거실 바닥에 내려놓는데, 어머니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큰언니 방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누가 쓰레기장에 버린 걸 쓰레기 치우는 사람들이 새 거라고 속여서 돈 받고 갖다 논 거 같구나. 영수증 보여달라고 해도 없다고 하고, 그런 나쁜 놈들이 있냐.."


어머니는 큰딸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정신병자를 속여서 돈을 뜯어간 놈들에게 화가 나 있었다. 내년이면 구십이지만 그나마 판단력이 있는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여쭈는데, 큰언니처럼 똑같이 조현병을 앓고 있는 작은 언니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대화를 방해하였다. 누군가에게 지불한 돈이 있으면 나머지 돈이 있어야는데, 나머지 돈에 대한 추궁에도 큰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요즘 언니들이 약을 먹지 않아서 증세가 더 심해지기도 했지만, 큰언니는 종종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장 앞을 서성이다 오곤 했었다. 어머니는 분리수거장에서 나쁜 놈들이 정신병자의 돈을 속여서 빼앗고 속이 빈 텔레비전 화면만 집 앞에 놓고 간 것이라고 확신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분노가 치밀어 오른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서둘러 동네 지구대로 향했다. 남편이 차를 지구대에 주차하고 셋이서 지구대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설명하였다.


"어제 오후에 어머니가 여기 오셔서 텔레비전 사기 사건에 대해서 말씀하고 가셨다는데, 혹시 사건 접수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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