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아홉 시 사십 분, 도로 상황도 나쁘지 않았고 조금 울상을 짓고 있는 하늘에선 비도 내리지 않아서 크게 나쁠 게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청주검찰청 정문을 들어설 때까진 그랬다.
수십 번을 넘게 드나들면서도 단 한 번도 시비가 붙지 않았는데, 오늘은 초소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직원분이 유독 깐깐하게 물어왔다. 차를 검찰청 안에 주차하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법원으로 이동하려는데, 또 나를 붙잡는다.
검찰청 안에 있는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볼 일 있다더니, 왜 검찰청 본관으로 향하지 않고 법원으로 가느냐고 엄중 수사를 펼친다. 오늘 형사 재판 모니터링이 있는데, 재판 시간이 임박해서 먼저 법원으로 가는 거라고 설명을 하면서 휴대폰에 찍힌 사건번호까지 보여주었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정부 행정조직과 아무 상관없는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그런데도 서울, 대전, 대구를 비롯하여 95프로 이상의 센터가 그 지역 검찰청 건물 안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법무부와 검찰, 그리고 기타 유관기관과의 긴밀한 협조 체제를 이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체를 또 하나의 발판으로 하여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같이 "공연한 정의감"에 휘말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줄 알고 들어오는 사람도 간혹 있다.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으면 나는 일찌감치 경찰의 길을 걷거나 검찰 공무원이라도 되었어야 하는데, 젊어선 뜻을 세우지 못했기에 그쪽 일엔 무관심했던 것도 같다. 게다가 시험공부가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니었으니, 내 우둔한 머리로 합격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323호 법정 방청석에는 유난히 늙은 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선고 공판부터 신속하게 호명되어 판결을 받고, 뒤이어 다른 형사 사건들의 번호에 따라서 피고들이 입장하였다. 나보다 오빠인 줄 알았는데 생년월일을 들어보니 나보다 세 살 아래인 아들이 피고석에 들어서자, 내 뒷자리에서 그의 어머니와 누나로 보이는 늙은 두 여인이 "우리 OO이 나왔네." 하며 "짝짝" 박수를 두 번 짧게 쳐서 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오십 먹은 아들보다 한참은 더 똑똑해 보이는 백발의 어머니가 내 뒤에서 조용히 수군거렸다. "판사님 말씀을 똑똑히 알아듣고 잘 대답해야 할 텐데~"
내가 맡은 모니터링 사건 번호가 호명되자 건장하게 잘 생긴 젊은 남자가 누런 죄수복을 입고 피고석에 앉았다. 판사가 피고에게 최후 변론의 기회를 주자, 그는 내 옆에 앉아있던 얌전한 60대 여인을 향해 "어머니께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모니터링을 마치고 법정에서 나와 검찰청으로 이동하면서 아까 경비 직원분과 약속한 대로 경비 초소에 들러 상황을 다시 설명하고 검찰청으로 들어가려는데, 이번엔 팀장이 나와서 "이번 주엔 법원에 재판이 없다"는 공문을 받았었다고 하면서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순식간에 거짓말쟁이로 몰리게 된 아줌마의 목소리가 격앙되면서 조목조목 반박을 하자, 수세에 몰린 경비 팀장이 차량 오부제까지 거론하며 나를 코너로 몰아붙이려 했다. 게다가 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검찰과 아무 상관없는 조직이라는 말까지 하는 걸로 보아서, 검찰에 더부살이나 하는 주제에 무얼 그리 따지느냐고 면박을 주는 것도 같았다.
차량 오부제 대목에서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확인하고, 거짓말쟁이로 몰렸던 내가 먼저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업무를 보고 있는 것뿐이므로, 그와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는 것이 무의미한 시간 낭비라고 판단해서였다.
검찰청 본관의 데스크 직원들은 이미 나의 얼굴을 알고 있는 터라서, 나는 신분증을 제출하지 않고 2층 피해자지원센터 사무실로 곧장 올라갔다. 모니터링한 내용을 다시 정확하게 기재해서 서류를 제출하고, 사무처장에게 방금 전 있었던 일을 거론했다.
지원센터의 위원들이 검찰청을 방문할 때마다 경비초소에서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고 말하는 사무처장에게, 이것은 새로 온 경비초소 팀장의 이해력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고 콕 집어 말했다.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으면, 내가 이 일을 못할 것 같다고까지 말했다. 왜냐하면 나만큼 모니터링을 잘하는 위원이 아직 청주 센터에는 없기 때문이며, 개인의 또 다른 목적이 없이 순수하게 일을 하기 위해 오는 사람도 드물다는 것을 사무처장은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무처장이 즉석에서 전화를 돌려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나의 차량 번호부터 적었다. 피해자지원센터의 일로 검찰청을 방문하는 위원들의 차량번호를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이것은 갑질의 행사가 아니라 엄연히 실행되어야 할 시스템의 개선이다. 피해자지원센터 내의 조직과 역할 및 수행력을 살펴볼 때 그 안에서도 개선되어야 할 것들이 여럿 있지만, 나는 굵직한 것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사소한 주차 시비 문제만 해결한 꼴이었다.
나는 오늘 갑질과 을질의 불분명한 경계를 오고 가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경계의 불분명함으로 인하여, 사회 문제를 "갑질과 을질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성이 있기 마련이다. 갑질과 을질의 문제로 사회 문제를 접근하기보다는, 전체 시스템의 문제로서 파악하여 해결점을 찾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때가 있다.
어떠한 사태에 대하여 "몰아가는 여론"도 분명히 "사회 현상으로서의 갑질"이다. 미투로 몇 명은 목숨을 끊었고, 누구는 정치 생명을 잃어버렸다. 갑질이 을질로 둔갑하고, 을질이 갑질이 되는 세상에서 나의 사유의 기준점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오늘은 그걸 생각하는 중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바꾸는 사소한 혁신조차도, 그것은 사유의 혁신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