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통골

by 도라지

보험은 잔뜩 들어놓고 꼬박꼬박 돈은 내면서도 정작 보험 청구를 하는 법을 모르는 남편을 위해(나를 위해?), 그의 휴대폰에 보험회사 어플을 깔아주다가 그가 가입한 상품들을 보게 되었다. 왜 진즉에 어플 까는 걸 안 해주었느냐고 마누라를 나무라신다면 할 말이 없다. 자신의 휴대폰은 자신이 관리하는 것이고, 자신의 인생도 자신이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홀인원을 몇 번이나 할까 의심스럽기도 하였지만, 납입 보험료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남편의 반응이 어찌 나올지 능히 예상이 되었지만, 한 마디 또 했다.


"2066년이면 백 살까지 골프 하라는 말이우? 그 설계사도 참 어지간하네유. 보험료는 또 왜 그렇게 비싼지.."


무엇이든 꼼꼼하게 살펴보고 확인하는 걸 싫어하는 남편은 그런 거 저런 거 상관하지 않고 싸인하는 타입이다. 이러니 마누라만 열 받쳐서 화병이 생기는 거다. 주로 본인이 실수하거나 잘못을 했을 때 목소리가 더 커지고 사나워지는 남편을 달래서 내 무릎 앞쪽으로 앉혀놓고, 그의 숱 없는 흰머리에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염색을 해주었다.


염색약을 발라주면서, 아주 많이 늙으신 어머니가 이제 얼마 있으면 육십이 될 아들을 앉혀 놓고 세상살이를 가르치는 심정으로 자분자분 말을 이어갔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에 육십이 가까워오도록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남편 앞에서, 갱년기 마누라는 기운이 쫙 빠져서 저절로 꼬부랑 할머니처럼 말투마저 기운이 없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다 큰 아들들 밥상을 차려주고 난 뒤에, 휴대폰을 열고 오랜만에 한 사람의 이름을 찾았다. 이년 만에 만난 그녀를 따라 대전 수통골로 들어갔다. 그녀는 느닷없이 연락을 취한 나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남편이랑 사는 게 많이 힘들죠?"라고 질문을 던졌다. 중학교에서 상담 교사로 재직 중인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처방보다 백번 나은 것은,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거짓 없이 드러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상담자에게 가장 좋은 상담은 자신의 상처를 먼저 보여주는 상담자일 수도 있다.

전생에 나는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무사유형" 남편을 만나 평생을 속 썩고 사는가 싶지만, 그런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밥을 얻어먹고 사니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사유하지 않을 때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지 않은가. 남편의 무사유는 결과적으로 악을 저지르기보다 타인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꼴이니, 어찌 보면 일종의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봐야겠다. 그래야 내가 살 수가 있다.


수통골 산책을 하고 시래기밥에 청국장으로 맛있는 저녁을 그녀와 함께 먹었다. 남편과 사는 동안은 밥값은 내가 내도 된다고 말했건만, 몇 해 전 남편을 사별한 그녀가 밥값을 지불했다. 언제까지 이 남편과 살 수 있을까 그것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얕으막한 계곡을 따라 수통골의 아늑한 산책길과 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가 마음에 든 내 입에서 다음엔 남편과 다시 와야겠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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