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펭귄

by 도라지

배우 송중기 목소리였다. 며칠 전 작정하고 시청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우연히 리모컨을 돌리다가 얻어걸린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에서 황제펭귄의 삶을 이야기하는 송중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전 제작된 작품을 재방송한 것이었다.


억척스러운 아빠 펭귄의 소리가 아니라 천연스러운 새끼 펭귄의 소리를 닮은 그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연이은 혹서의 날씨 속에 눈에 들어온 시원한 얼음 대륙 때문이었을까. 나는 매미가 죽을힘을 다해 울어버린 날, 뜻밖에도 차가운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어미 펭귄이 낳은 알을 품고 있던 아빠 펭귄에게서 새끼가 겨울철에 태어나는 이유는 천적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려는 목적이라고 했다. 혹한의 추위를 이기고 살아남은 새끼들이 털갈이를 시작하고 제법 자라게 되면, 부모 펭귄들은 새끼 펭귄들을 서식지에 남겨두고 일제히 부부의 이름도 버리고 각기 흩어져 남극의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면 새끼들은 스스로 생명의 본능을 따라 바다로 나가서 먹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다시 계절이 바뀌고 짝짓기 시즌이 되면 펭귄들은 바다에서 나와 짝을 찾게 되지만, 예전에 맺었던 부부 인연을 다시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자연이 주는 서식 환경 속에서 개체들은 저마다 다르게 타고난 생명체로써의 생을 살다가는데, 황제펭귄들은 자식이 성장하면 여지없이 이별하는 것이 순리인 셈이다. 그러니까 펭귄의 도리는 "이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생명보존활동에선 부모와 새끼 간의 이별뿐만이 아니라 부부 사이에 이별까지도 일종의 순리이며 지켜야 할 덕목 같은 것일 수 있다. 지난번 파트너가 아니라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서 다른 유전자를 계승한 알을 낳는 것이, 남극의 혹한에서 종족의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인지도 모를 일이다.


생태계에서 개체들의 존재 값은 생명의 전승에 있다. 생명의 전승 임무를 완수하면, 그때부터 개체들은 비로소 온전히 하나의 존재로서 '생명하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삶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누리며 살 수가 있게 된다.


인간 종족에서는 황제펭귄 종족처럼 해마다 새로운 짝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새끼 펭귄처럼 몇 개월 만에 성숙한 개체가 되어 스스로 먹이 활동을 시작하는 인간 아기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아이들이 스스로 먹이 활동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이십여 년 동안은 부모의 품에 끼고 있어야만 한다. 새끼 펭귄처럼 얼른얼른 자라는 인간 아기를 배양하는 공상과학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현실에선 전혀 불가능한 망상이다.


해마다 새로운 짝을 만나는 건 바라지도 않거니와 상상하기도 싫다. 그 고생질을 반복하고 싶은 어리석음이 일신의 평화를 추구하는 욕망보다 크지 않은 까닭이다. 다만 부러운 것은, 자식 놈들 다 키워 먹이 활동을 하도록 유도했으면 이제는 황제펭귄들처럼 각자 본연의 개체로서 "바다"로 흩어져 돌아가는 삶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유로운 연애관을 문명의 기초로 알고 성장한 세대들이지만, 오십 대의 우리들은 대부분 부모님 슬하에서 양육받다가 결혼 생활로 막바로 진입한 세대들이다. 결국 이 말인즉슨, 혼자만의 독립된 개체 활동 시기를 많이 누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는 그나마 노년을 자식들에 의존하는 문명의 시기에 놓여 있었지만, 우리 세대는 자식에 의존할 수 없는 독립된 노년을 살아가야 하는 다른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또 다른 문명의 시대에서 교육을 받고 늙어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제 부부의 이름표도 떼어버리고 각자의 고유한 이름표를 다시 붙여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황제펭귄에게 먹을 것과 휴식을 제공하는 남극의 바다는, 그들에겐 삶의 터전이며 생명의 원천임과 동시에 생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자유롭기 위해 펭귄들은 바다로 혼자서 나아간다.


그동안 가정과 자식에 얽매여 있던 우리도, 이제는 하나의 존재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겐 연금과 저축이라는 "바다"가 있다. 물론 나 같은 아줌마에겐 해당되는 부분이 그리 크지 않은 바다이긴 하지만, 오늘은 그저 하나의 공통된 종족으로서 오십 대의 우리들을 응원하고 싶다.


자~ 떠나자!! 저 푸른 바다로~ 저마다 혼자만의 고요한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야 하는 우리는, 남극의 황제펭귄 아니고 대한민국의 황제 중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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