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패였다. 집에 돌아가서 나이트 근무 갈 큰아들 밥이라도 차려주려고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는데, 주차장 맞은편 잔디공원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에 이끌려 기어이 거대한 천막 속으로 우산을 접고 들어갔다.
무대 위에선 큰아들이 졸업한 대학교의 실용음악과 학생들로 구성된 밴드가 7080 세대를 위한 노래들을 선곡해서 열창하고 있는데, 듬성듬성 앉아있던 관객들마저 자꾸만 일어나서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번갈아 무대에 오르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젊은 학생들 뒤로, 전자 시그널에 따라 화려한 무대 배경이 바뀌어가는 사이에도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이고 서있는 아이보리색의 천막 위에 고여있던 빗물이, 오선지 위의 음계처럼 때마다 반복하여 아래로 낙수를 밀어 떨어뜨리며 시원한 악기 소리를 냈다.
이제 관객석엔 우리처럼 산행을 다녀오다가 걸음을 멈춘 몇 커플들과, 연세가 지긋하신 동네 주민들과 <속리산 신화여행축제>의 폐막 음악회를 미리 알고 온 듯한 말끔한 차림의 관광객들 몇 팀만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지켰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낭패가 아니라 행운이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시간을 지체하였지만, 뜻밖의 곳에서 계획에 없던 공연을 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차라리 행운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풀지도 않고 박수를 치며 의자에서 가볍게 팔을 흔들었다. 높게 세워진 천막 안 허공 위로 공중촬영을 하고 있는 드론 한 대가 남편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
<옛사랑>이 흐르고 <잊혀진 계절>이 흐르고, <비처럼 음악처럼> 외 다른 곡들이 잔디공원을 가득 메우는 동안 어느덧 한 시간이 흘러갔다. 어두워져가는 하늘엔 아직도 태풍이 몰고 온 비구름이 버티고 있고, 속리산 잔디공원의 소나무들은 의연하게 비를 맞으며 축제를 은밀히 즐기는 듯도 보였다.
태풍 같은 삼십여 년 세월을 함께 건너온 부부가, 무대 뒤에 펼쳐진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과 보은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속리산 신화여행축제>의 연결점을 찾느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속리산 오기 전날은 무주구천동 계곡을 트레킹하고 내려오다가 <구천동 여름 음악축제>를 구경했었다. 멀리서 노라조의 "슈퍼맨"이 들리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연장 쪽을 향해 뛰었다. 평소엔 무릎 연골 아낀다고 잘 뛰지 않던 마누라가, 노라조 볼 생각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운동 마니아 남편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단다.
무릎 연골의 소중함도 잊고 공연장에 도착했는데, 의상만 노라조 버금가는 듀엣 가수가 무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도 신이 난 관객들의 함성이 구천동의 늦은 저녁을 축제 분위기로 물들여갔다. 검어진 하늘에 별들은 숨어있고, 펜션과 상점들의 불빛이 여름밤을 수놓았었다.
가는 곳마다 축제요 흥겨운 노랫소리가 가득한 한여름의 절정 속에서, 부부는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들이 밥을 비벼먹고 간 그릇이 싱크대에 들어가 있는 걸 확인하고, 등산복을 벗지도 않은 채 물부터 올렸다. 학생들 공연 보느라 저녁밥 때를 지나쳤다.
남편과 둘이서 늦은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먹고, 어제 무주에서 사 온 복숭아로 입가심을 하였다. 복숭아가 유난히 단 여름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