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걷는 게 아예 힘들어진 어머니의 기력 보충을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동네 병원에 영양제 주사를 맞으러 갈 때였다. 동네 병원이라고는 해도 바로 집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 병원은 건물 3층에 위치해 있어서 휠체어와 자동차를 이용하는 게 편리할 거 같았다.
그런데 며칠째 친정집엘 드나들며 이일저일 하느라 기력이 빠졌는지, 나 혼자서는 도무지 어머니를 모시고 이동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사무실에 나가 일을 보고 있던 남편의 도움으로 그날 어머니는 병원엘 다녀오셨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건물 3층으로 올라가는데 휠체어의 바퀴가 잘 구르지 않았다. 며칠 전 동사무소에서 휠체어를 대여해 올 때, 바퀴에 바람이 빠져있는 걸 미처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세 시간가량 링거 바늘을 꽂고 계시던 어머니를 부모님 집에 모셔다 드리고, 나는 남편에게 경비실 가서 휠체어 바퀴에 바람을 넣어오라고 부탁했다. 바퀴에 바람을 넣은 휠체어를 접어서 들고 온 남편이 거실에 휠체어를 다시 펴놓는 사이, 나는 황급히 부모님의 저녁상을 차렸다.
늙고 가련한 부모님을 집에 두고 문을 나서는데, 어느새 더 왜소해진 부모님이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들의 눈빛으로 처량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는지, 처가에서 별로 받은 것도 없는 남편이 장인장모께 용돈을 더 챙겨드리자고 하였다.
나의 친정은 생로병사의 자연스러운 과정만 있는 집이 아니다. 정신에 병이 들어 삼십 년째 고통의 동굴 속에 갇혀 살고 있는 두 명의 언니들과 그들을 보살핀 부모님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어찌 보면 매우 나쁜 운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운과 좋은 운이라는 것 또한 우주에선 어쩌면 애당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연에선 누군가에겐 불운한 일이 누군가에겐 행운이 되기도 하므로, 우주 전체로 볼 때는 그냥 일어날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한 시선으로 본다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태어나면 죽는다"는 단 하나의 보편적 의무만이 인간에게 주어질 따름이다.
잘 굴러가는 일이 휠체어의 보편적 의무라고 할 때, 바퀴에 주입하는 공기 밀도도 '적당한 정도'라는 게 있다고 한다. 바퀴가 터질 듯이 공기를 주입했다고 해서 그 바퀴가 더 잘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친정집의 특수한 상황을 견뎌내야 하는 나는, 언제나 신체와 마음에 적당한 밀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얼마 뒤면 설날인데 부모님께 용돈을 거푸 드리라고 말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동안 '똑똑하지 못한 남편'이라고 은근히 무시하고 살았던 나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깡그리 내다 버리기로 작정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을 하던 남편이 전날 입었던 외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어제 장모님 휠체어 바퀴에 바람 넣고 마개를 안 잠그고 왔네. 오늘 처갓집 갈 때 가지고 가서 끼워 드려."
옛날에는 바퀴의 공기 주입구에 마개가 없는 자전거들도 거리에 많이 돌아다녔다고, 남편이 싱겁게 너스레를 떨며 출근을 했다. 천진한 얼굴로 출근하는 남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어제저녁의 결심을 다시 새겨야만 했다.
마개 없는 바퀴일지언정 잠시라도 운행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휠체어 바퀴는 보편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조금 모자란 듯이 굴러가는 것도 인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지만, 남편에 대해 설정해 놓은 마음은 삽시간에 궤도를 이탈하기도 하니 그건 매번 어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