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살이에 형편이 있듯이, 마음에도 형편이란 것이 있다. 결혼에서 시작된 가난한 살림 형편이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 마음의 형편은 오히려 남루해져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마음의 형편은 비단 옹색한 마음의 크기만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인내심이 강하다는 것은 의학적 관점에선 그다지 권유할 성질의 것은 아닌 것도 같다. 하지만 사람마다 타고난 신체의 특성과 심성의 특성이 다르다 보니, 누군가에겐 '강인한 인내심'이 의학적으로 신체의 병과 무관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많이 참고 살아서 병이 생겼다"는 나의 주장은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남의 신체와 정신의 사정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너무 참고 살아서 병이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속으로 삭인 화가 쌓여 심장과 혈관에 무리를 주고 있다는 소견은 비단 나의 것만은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나의 일상은 더욱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 신경 쓰는 일이 생기면 금세 머리가 아파져서 두루 일을 처리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한 마디로 등신이 다 되었다.
등신이 다 되었으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여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데, 내 신체의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안팎의 모든 일과 문제들이 다 보인다는 것이 큰 문제다. 축복과 재앙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하나의 사태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해석일 때도 있다. 겨우 하나 가진 능력이 나의 병을 불러온 주범으로 작용하게 되었음을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매사에 조금씩(?) 손해보고 사는 것이 내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고 기도문처럼 외워보지만, 이미 망가진 신체 회로를 본래의 기능대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이러한 나의 심신의 형편을 십분 이해하기란 어렵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유한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안에 갇힐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졌기 때문이다. 자기 외부의 타자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날 친구가 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나에게 실버모델 학원에 등록해보라는 말을 했다. 여고 1학년 시절부터 나를 지켜보았던 친구의 입에서, "늙어서라도 한번 폼나게 멋지게 살아봐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그날 내가 점심 모임에 입고 나간 짙은 청색의 원피스가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매일 하루마다 사느냐 죽느냐의 혈투를 벌이며 비장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의 형편을 친구들이 훤히 들여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내 혈관을 팽창시키는 데 일등공신인 남편을 안 보고 사는 길만이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판에, 친구의 실버모델학원 입학 제안은 가당치도 않게 들렸다. 친구의 진지한 눈빛과 어투에 구태여 찬물 끼얹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날 나는 "생각해보겠다"라는 답으로 얼렁뚱땅 화제를 돌렸었다.
물론 세상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몸에서 이상신호가 연달아 작동한다는 것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나의 한계점에 대한 인식은 내 목숨 부지를 위한 해결책을 강구하라고 속삭인다.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고 했는데, 나는 지금 남은 목숨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각오 중이다. 나에겐 앞으로 닥쳐올 노년의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할 겨를마저 없다. 오늘 하루 죽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느냐, 이것이 얼추 늙은 나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