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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07. 2024

검은 우매(愚昧)

지금은 정신 병원에 들어가 있는 큰언니의 대학 시절 책장엔 <自己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제목의 책이 꽂혀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나는 중학생쯤 되었을 것이다. 책장 속에 나란히 꽂혀있던 책들 가운데 유독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제목은, 어린 나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었다.


오늘 내가 문득 그 책을 떠올리며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라즈니쉬가 썼던가 잠시 혼동을 일으켰던 것은, 크리슈나무르티와 라즈니쉬가 같은 인도 출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크기와 두께를 가진 책들이 꽂혀있는 가운데서 크리슈나무르티가 지은 의 제목이 툭 튀어나와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린 반면에, 라즈니쉬의 책들은 제목보다 사람 이름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도 기묘한 우연이다.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와 오쇼 라즈니쉬(1931~1990)는 인도 출신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나 말년에 기이한 행보를 보인 라즈니쉬에 비한다면야 크리슈나무르티의 '자유론'이 상대적으로 학문적 연구의 가치가 더 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누가 더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렀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라즈니쉬는 1980년대에 미국 오리건 주(州) 와스코 카운티에 황무지를 대규모로 사들여 히피들의 코뮨(공동체)을 건설한 바 있다. 한국의 홍신자, 류시화가 라즈니쉬의 제자가 되었다.

 

내가 조금 더 자라서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 나는 무심코 언니의 책장에서 그 책을 뽑아서 몇 페이지를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완독은 아니었을 테고, 그저 몇 장씩 뭉텅뭉텅 읽어 내려가며 혹시나 재밌는 대목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전교 1등 자리를 별로 놓쳐본 적이 없던 큰언니의 책장 덕분에,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수준 높은 책들을 일찌감치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아마도 끝까지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니는 그 책을 끝까지 읽었을까, 그러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대대로 천주교의 전통을 따른 집안도 아니었고 모태 신앙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자에 가서 새벽 불공을 드리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천주교로 종교를 바꾸면서,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역사에 재앙인지 축복인지 모를 획을 긋고야 말았다. 잿빛 승려복과 검은 사제의 옷 속에 가려진 진실이 무엇이든, 어머니 덕분에 우리 자매들은 고귀한 정신의 덕(德)만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가치라고 생각하는 우매(愚昧)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의 우매(愚昧)는 검은색에 가까웠다. 회색때를 타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옷이 되기도 했었지만, 역시나 중립적인 색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우리 집안의 성정이 중립적인 데가 있었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우매(愚昧)에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회색에 비한다면 차라리 검은색은 단호하고 극단적이라서, 오히려 때(오염)에 노출되기도 쉽다.


사람들을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 자유롭게 하는 것 그 한 가지에 관심을 두었던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자유'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구조와 한계를 벗어나서 '아는 것(인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란 바로 의식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자유를 획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니들은 의식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의식 세계 속에 자신들을 가두었다. 그 책들은 아직도 구순 부모님 집의 책장에 꽂혀있고, 언니들은 그 책장 뒤편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시공간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 뜨겁고 지루하던 여름이 끝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는 느낌이다. 어머니는 언니들 내복과 겨울옷을 준비하라고 나를 재촉하신다. 이제 언니들은 그곳에서 두 번째 겨울을 보내야 한다. 나는 때가 잘 타지 않는 회색 스웨터를 하나씩 장만하였다. 여기는 한낮에 아직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없지 않은데, 언니들이 있는 곳엔 벌써 검은 우매와 같은 냉기가 올라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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