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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an 24. 2023

아름다운 쾌락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의 낯빛은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다. 명절에 속상한 일이 있었지만 끝내 한 마디도 입을 열지 못한 채로 가슴에 꾹꾹 담아둔 내 입꼬리처럼, 오늘 낮에 보았던 하늘의 입꼬리도 결코 웃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속에도 태양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나에겐 모든 하늘이 위로가 되기도 하였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모든 순간 속에 아름다움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 믿는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환기 화백의 <여인들과 항아리> 작품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감상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잿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하늘에서 거대한 밀가루 포대가 터져버린 것처가늘고 하얀 눈들이 사방으로 퍼져서 쉴 새 없이 날아다녔다.


흩날리는 흰 눈들이 뒤덮어버린 도로 위를 운전하고 있노라니, 그 순간 나의 모습이 방금 전 미술관에서 관람했던 비디오아트처럼 어느새 하나의 작품으로 느껴졌. 내 인생을 제작하는 것은 나 자신이므로, 어쩌면 내가 나의 작품이라는 말은 아예 틀린 말도 아닐 듯싶다. 


김환기 작품의 아름다움에 취해버린 나머지, 내일은 혼자서 조용히 <여인들과 항아리> 그림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덩달아 아름답고 그리운 얼굴도 하나 스쳐 지나갔다. 왜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는 것인지 누군가 그 이유를 뇌과학으로 설명하려 든다면, 나는 구태여 그 설명을 듣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작품에 매혹당하는 것은 마치 마약에 취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다. 환각과 아름다움에 대한 연쇄작용은 어딘가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독소처럼 쌓여있는 슬픔과 연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에겐 일종의 환각이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게 드리운 짙은 슬픔과 깊은 연민의 감정을 마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쾌락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절 연휴의 마지막 날에, 나는 아름다운 쾌락을 찾아서 친구와 함께 미술관에 다녀왔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두 언니는 보름 사이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두 언니에 대한 슬픈 연민의 감정은 내게 끊임없이 고통을 안겨주었다. 삼십 년쯤 되었으니 연민도 고통도 옅어질 만하련만, 나는 여전히 비통한 연민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누더기처럼 헤어지고 시들해진 나의 영혼은 새로운 희망과 활기가 필요했다.


걷는 것은 고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있지도 못할 만큼 병약해졌던 어머니는 기적처럼 일어나서 명절 밥상을 장만하셨다. 나는 설날 명절에 가족들 앞에서 그것을 "기적의 밥상"이라고 표현했었다.


평생토록 어머니의 아름다운 쾌락은 가족들 위해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고된 노동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 어떤 이에겐 소중하고 아름다운 쾌락일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 아무리 처절한 인생에도 순간순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의 거룩한 사명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든 어떠한 아름다움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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