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청춘 스케치 4

by 도라지

그날은 서로 소개를 하며 인사를 나누느라 공부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 함께 공부할 과목별 책을 정하고 매주 공부할 분량이나 파트를 어림해서 나누었다. 기승 오빠도 굳이 점자책이 아니어도 그냥 앉아서 공부 내용을 듣겠다고 했다.


시계가 어느덧 아홉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야자 시간이 곧 끝날 시간이다. 우리는 서둘러 교실을 정리하고 본관 일층으로 내려왔다. 민아 언니와 기승 오빠가 지팡이를 두드리며 먼저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다음 주에 만나자고 말하는 기승 오빠의 목소리가 공중에 붕 뜬것처럼 설레고 있었다. 맹학교 교문을 통과해서, 우리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수정이가 말했다.


"너네 둘, 같은 버스 방향 아니니? 서은이 몇 번 버스 타?"


"32번 향군로 버스"라고 내가 대답하자, 준영이가 말했다.


"나도 그 버스 타는데, 난 종점에서 내려~"


세상에~, 운명의 여신은 분명히 내 편이었다. 그러자 수정이가 다시 말했다.


"그럼, 준영아, 너 중간에 내려서 서은이 좀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가면 안될까?"


준영이가 우리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리면, 종점까지 다시 버스를 타든가 적어도 이십 분을 넘게 걸어가야만 한다. 미안한 일이다.


"아니야, 수정아, 그러면 준영이 너무 피곤해져~우리 집에서 종점까진 한참이야."


학교에서 도보로 십 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는 수정이를 먼저 보내고, 학교에서 우르르 애들이 몰려나오기 전에 때마침 32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 맨 뒷자리가 비어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다. 아직 일교차가 있어서 그런지, 준영이는 연신 킁킁거렸다.


"너는 어느 학교 다녀?"


아까 민아 언니네 학교 교실에서 묻지 않았던 게 생각이 났다.


"나 자퇴했어. 청일고 다니다가, 작년에 그만뒀어. 킁 킁"


세상만사 대수로울 게 없다는 듯, 준영이가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 마치 그의 DNA 속엔 시큰둥한 나른함들만이 줄지어 다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준영이는 이제껏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도 뛰어나고 인물도 잘생긴 오빠가 불량한 학생들과 어울리며 주먹다툼을 벌이고 다녔어도, 오빠는 고등학교는 무사히 졸업했었다. 그런데 내 옆에 이렇게 선한 얼굴을 한 조각상 남자애는 무슨 이유로 자퇴를 했던 것일까? 나는 괜히 곤란한 질문이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학교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형제가 몇이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준영이는 사남매라고 대답을 했다. 위로 두 살 많은 형과 아래로 두 살 터울이지만 일 년 후배 격인 남동생이 있고, 네 살 어린 막내 여동생이 있다고 했다. 준영이는 우리 집은 형제가 몇이냐고 묻지 않는다. 나에 관해 별로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느덧 버스가 우리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준영이가 나를 따라 내릴까 봐 은근히 기대 반 걱정 반 했는데, 준영이는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이 시각이면, 야자가 끝나서 귀가하는 늘 그 시간이다. 언제나 씩씩하고 빠른 걸음으로 단숨에 집 앞까지 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같은 길이의 거리인데도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다음 날 오후, 청소 시간이 시작될 때였다. 1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재일이가 교실로 날 찾아왔다. 지금은 이과반으로 간 재일이랑은 말타기 클럽 친구였다. 청소 얼른 마치고 소각장으로 오라고 한다.


소각장엔 1학년 때 말타기 멤버들이 다 모여 있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타고난 재능을 찾아서 이과와 문과로 나뉘어 학교생활 중이지만, 가끔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한 번씩 서로의 말이 되기도 하였다. 재일이가 행동력과 인솔력이 좋은 탓이다.


그러고 보니 소각장도 붉은색 벽돌로 둥그런 아치 형태로 쌓아 올려져 있다. 여기선 붉은색 동산교회도 한눈에 바라다 보였다. 소각장 굴뚝에서 회색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재일이가 한 달간 소각장 책임을 맡았다고 자랑을 한다. 청소시간에 소각장 책임자는 거의 불장난하며 노는 수준이다. 마무리는 학교 건물 일을 봐주시는 아저씨께서 다 해주시니까, 청소시간에 소각장 배치는 우리들에겐 로망이었다. 자연을 벗 삼아 삼십 분 동안 산책하고 놀면 된다.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으니, 슬슬 말을 탈 준비들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아는 그 사이 살이 더 붙은 것도 같았다. 수현이는 수험생이 운동을 따로 할 리도 없는데, 못 보던 팔근육이 생긴 듯도 했다. 영란이는 안경을 새로 했는지, 자꾸만 새 안경을 신경 쓰고 있다. 때가 되면 안경을 벗고 독한 눈빛을 드러내는 친구다. 선희는 못 만났던 동안에 정말 남친이라도 생긴 건지, 더 이뻐진 거 같다. 목사님 따님이라곤 상상도 못 할 만큼 시끄럽게 까불대지만, 우리들 중 미모는 단연 일등이다. 다들 키가 커서, 교실에서 맨 뒷줄에 앉아있는 애들이다. 우리는 태릉 선수촌의 선수들도 아니면서, 서로의 몸들을 살피며 가위바위보로 편을 가른다.


겨우 두 판을 뛰었을 때였다. 종소리가 울렸다. 친구들은 '아, 듣기 싫다, 저 소리~'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교실로 달려갔다.


(2021년 10월 4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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